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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다, 《칠드런Children》



《칠드런Children》 이사카 코타로| 양억관 역| 작가정신| 2005.01.15(2004) | 392p

일본에서 2004년에 출판되었으니, 내가 본 이사카 코타로의 책 중엔 초기 작품군에 들 소설이다.
처음 본 그의 책이 《사신 치바》라 그런지 몰라도, 이야기가 연속되는 장편보다는 연작의 형식으로 쓴 단편집 형태의 장편을 볼 때가 이사카 코타로의 글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과 영화를 함께 보고 자란 세대의 작가답게, 이사카 코타로는 종종 영화적 구성을 소설의 스토리텔링에 차용한다. 그 세대가 열광했던 영화 <펄프 픽션>이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처럼 퍼즐을 엮듯 등장인물들을 교차시킨다. 그 안에 독특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이야기의 매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다.

2000년에 데뷔해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이고,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바다 건너에 있는 그에게 세대가 같다는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스티븐 시걸을 좋아하는 것도, 우경화되어가는 사회에 분리된 비판의식을 갖는 것도, 가끔은 노인네스럽게 비틀즈에 열광하는 것도.

<칠드런>은 그의 글 중엔 소품격이라 할 만한 글이겠지만, 그의 장점이 잘 녹아 있어 읽는 내내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정작 드러내고 싶은 인물은 남겨둔 채, 다른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데, 다 읽고 난 후에 인상에 남는 것은 작가가 조명하고 싶었던 인물이다.
<사신 치바>가 딱 그런 스타일의 글이었는데, <칠드런>에서는 가정법원에서 소년사건을 담당하는 조사관 ‘진나이’가 그 사람이다.

독특한 세계관의 소유자라 낯설어 보이는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데다, 엉뚱한 행동이 종종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유쾌한 사람이며, 종내에는 문제 많은 아이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투박하게 인도하는 ‘어른’의 모습까지 보여 준다.

감칠맛 나는 문장이 탁탁 눈에 박혀 즐거웠다. 몇 개만 옮기며 짧은 감상을 마치련다.

"어린이는 영어로 차일드야. 그런데 복수가 되면 차일즈가 아니라 칠드런이 된다 말이지. 아이는 다 다른 꼴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부부 싸움의 내용을 차근차근 따지고 들어가면 대체로 원인은 똑같다. '오기' 와 '인내'다.

"원래 어른이 폼 나면 아이도 폼이 나게 돼 있어."

그리고 진나이의 목소리를 빌린 이 문장.

"소년을 만나는 데 심리학이나 사회학은 아무 소용없어. 그놈들은 통계도 아니고, 수학이나 화학식도 아냐. 그렇잖아? 게다가 누구든 자신을 오리지널 인간이라고 생각해. 누구와 닮았다고 하면 싫어한다고. 나는 존 레논과 닮았다는 소릴 참지 못해. 그런데 조사관이 '아, 이놈은 이런 가정환경 패턴이로군', '이건 이전에 다뤘던 비행과 같은 케이스로군' 그런 식으로 틀에 맞추면 누가 좋아하겠어. 발렌타인데이에 옆에 있는 놈하고 똑같은 초콜릿을 받는 거랑 똑같다고.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초콜릿을 받고 좋아라고 펼쳐 보았는데, 다른 놈들한테 돌린 거하고 똑같으면 어떻겠어. 그런 비극은 필요 없다고. 조사관은 담당하는 소년이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세계에서 하나뿐인 놈'이라고 생각해야 해. 그렇게 마주하지 않으면 조사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야."

소년 시절, 이런 어른을 한 명이라도 만나는 아이는 무척이나 운 좋은 녀석이다.

by 신독 | 2009/10/13 10:49 | 궤적 | 트랙백 | 덧글(2)


[나들이] 계룡산 동학사

계룡산의 동학사 집단시설지구에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산행이 목적이 아니라 지인들과 주담을 나눌 목적으로만 간 터라, 이번에도 계룡산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셨다. 조망은 또 얼마나 좋던지. -_-a
(동학사로 오르는 길은 벚꽃이 좋다는데, 봄에는 또 모인 적이 없구나. ㅎ)
그래도 아쉬우니, 계룡산 지도라도 ☞링크(파란 지도)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 집단시설지구로 빠져, '미르 쉼터'라는 팬션에서 일박했다. 사진은 팬션에서 본 장군봉]

지도에서 '박정자 삼거리'를 보며, 박정자라는 사람이 꽤 유명한 지역 인사였나 보다 했는데... 찾아 보니 영 아니더라. ㅎ
(예전 이곳에 밀양 박씨들이 모여 살며 정자나무를 심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쉬는 장소를 만들었다 한다. 박씨들이 정자나무를 심은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朴亭子'라 부르는 마을이었다더라. 설에 따라 밀양 박씨 집성촌이나 박씨 개인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어쨌든 박은 성이고, 정자는 정자나무를 가리키는 모양)

토욜은 왕주와 함께 주담이 오갔고, 일욜 아침 장렬히 퍼져 버린 일행들을 팽개쳐 둔 채 부산에서 오신 로운 님 가족과 함께 동학사에 들렀다.
아래는 동학사 매표소에서 찍은 계룡산 안내도.


[동학사 일주문]

일주문을 통과해 불국토에 들어서는 저 두 아이가 로운 님 첫째 딸 유진이와 둘째 딸 유주, 아기 때부터 사진을 본 이 애들이 벌써 5학년, 3학년이란다. ㅎ
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학사(東鶴寺)는 고찰답게 가람 배치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더라.
일주문 다음에는 보통 천왕문과 불이문이 이어지는데, 특이하게도 홍살문이 우리를 맞았다.
(궁궐이나 관아, 능, 묘, 원 등에 세우는 문으로 사찰에서 이 문을 볼 줄은 몰랐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로운 님도 '이상타' 하시더라)

아담한 정자 세심정과 미타암 등의 암자를 지나자,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의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학사 대웅전. 오른쪽 뒷모습 남자가 로운 님, 왼쪽은 형수와 막내 유정이]

로운 님 가족이 대웅전에서 삼배를 드리는 동안, 나는 대웅전 뒤쪽으로 가 보았다.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시는 절이라 그런지, 탱화에 대한 설명까지 아기자기하게 게시되어 있더라. 감사하기도 하지.



[대웅전 뒤꼍에서 본 계룡산 쌀개봉, 날씨가 참으로 좋았다. 능선 타기 딱 좋은 날이더라. 쩝쩝]

동학사는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가 어린 곳이다. 이문구 씨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보며 헛헛한 한숨을 들이키게 했던 매월당 선생은 이곳에서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을 위한 제단을 마련했다. 이 제단에 전각이 세워진 것이 동학사 대웅전 옆에 자리한 '숙모전'이다.
매월당이 이곳에서 초혼제를 지낸 것은, 고려의 유신 길재가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동학사에서 지낸 것을 기린 것이리라. 길재의 사후에는 정몽주와 이색, 길재의 초혼제가 치러졌고, 현재의 '삼은각'이 세워졌다.
사진기 상태가 안 좋기도 했고, 왠지 마음이 가라앉는 듯해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동학사는 내게 승가대학이라기보다는 위령을 위한 초혼의 사찰이다.

전날, 동학사를 둘러보신 소심 형이 굉장한 부도를 보았다 하신 것이 기억나 내려오는 길에 부도밭에 들렀다.
이 부도밭은 이 근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부도들을 1993년에 모은 것이라 하는데, 그 후에 동학사에서 강론을 하셨던 스님들의 부도 또한 이곳에 모시는 모양이다.
조선시대와 대한민국의 부도 형식이 한데 모여 있는 격이랄까?

[실상암 건너편에 있는 부도밭. 뒤의 두 줄은 조선 때 부도들이고, 앞줄의 부도는 최근 것들이다]


[소심 형님이 감탄했다는 그 부도. 석탑 형식으로 만든 부도인데 추녀의 용 머리 장식이 눈길을 끌더라]

계룡산에는 이번에도 안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동학사가 조금은 아쉬움을 달래 주었다.

사육신의 시신을 홀로 수습한 스물다섯의 젊은 김시습은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타협을 완벽하게 거부한 채.
매월당을 기억하는 이라면, 한 번쯤은 선생을 기리며 가보아야 할 곳이 동학사이다.
생각보다 허전한 가람에 허할지라도, 그곳은 완벽한 비타협을 실천한 선비의 숨결이 서린 곳이니.

by 신독 | 2009/10/11 22:12 | 잡설 | 트랙백 | 덧글(8)


[감상] 파시스트들의 유토피아? 《스타십 트루퍼스 Starship troopers, 로버트 A. 하인라인》

《스타십 트루퍼스 Starship troopers》 로버트 A. 하인라인| 강수백 역| 행복한책읽기| 2003.06.20(1959) | 456p

동명의 영화(폴 버호벤, 1997)를 이미 본 터라, 그다지 손이 가지는 않았던 책인데…… ‘원작을 망친 영화’라는 지인의 혹평에 끌려 원작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망쳤다’ 혹평했던 그 영화도 꽤 괜찮게 보았기 때문에)
하인라인이 1959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강화복(powered suit, 스타크래프트의 마린을 생각하면 되겠다)’이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SF 장르의 고전이 될 가치가 있겠지만,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한 것은 역시 ‘군대’였다.

나는 군대를 참 싫어했다.
내가 동의한 적 없는 의무를 위해, 내 의사와 무관하게 가야 했던 군대에서 나는 꽤 많은 것을 잃었다. 그랬기에, 제대 후 가끔씩 들었던 ‘군인 같다’는 말이 내게는 참 아이러니였다. 해병대 출신이냐는 말도 들어보았으니 뭐. (도대체 내 어디가?)

조니 리코라는 고등학교 졸업생의 성장소설이라 할 <스타십 트루퍼스>는 주인공 리코가 하인라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군인으로 성장해가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그렇지만, 영화를 만든 폴 버호벤도 하인라인이 말하는 군인상(像)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라 할 영화를 보면, 폴 버호벤은 하인라인의 군인상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7년 당시 기술력의 한계 내지, 감독의 의도로 사용하지 않았을 ‘강화복’ 컨셉은 그렇다 쳐도 하인라인이 이상적 군대로 그렸던 지구방위군 장교에게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 군복을 입힌 것 하나만 보아도. 폴 버호벤은 하인라인이 만든 군대 사회를 ‘군국주의’로 본 것이 틀림없다. 그것의 조롱을 위한 장치들이 영화 속에는 너무도 적나라하니까.

흥미로운 것은 하인라인이나 폴 버호벤 모두 해군에 복무한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하인라인은 장교, 버호벤은 사병 출신이라는 것이 다르겠지만.
미국과 네덜란드의 해군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군대 문화라는 건 대동소이한 계급 구조만큼이나 어느 나라나 비슷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내내 나 또한 내 군생활을 여러 차례 떠올렸으니.

<스타십 트루퍼스>의 시대 배경인 미래 사회는 명예롭게 군생활을 마친 이들만이 참정권을 가진다. 그렇기에 지원자만 군 입대가 가능한 모병제다. 이는,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시민’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적 사회로 삼아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했다면, 하인라인은 고대 시민의 개념을 확장해 스타십 트루퍼스의 세계관을 만들었다고나 할까.

역자인 강수백 씨는 하인라인이 비판받았던 ‘군국주의’나 ‘파시즘’보다는 ‘리버테리어니즘(Libertarianism, 미국적 개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사상)’이나 우익적 아나키즘의 영향을 짙게 함유한 일종의 엘리트주의라 이 소설의 세계관을 보고 있더라.
소설에 한정하지 않고, 하인라인을 ‘주의’나 ‘사상’으로 묶는 것은 사실 무의미해 보인다. 혁명에 대해서도 소설(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1966)을 썼고, 히피적 삶을 예찬(낯선 땅 이방인, 1961)하기도 한 사람 아니던가. 논쟁적 주제를 특유의 장광설에 담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SF적 설정들 사이에 녹여내는 것이 하인라인의 글쓰기인데, 이런 이의 세계관을 기존의 주의나 사상으로 설명하려 하면 작품에 따라 모순이 중첩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파시스트들의 유토피아를 그린 하인라인의 고전’이라 본 사람(Kenneth Turan)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하인라인이 그린 군대 사회는 ‘해군 사관이 꿈꾸는 유토피아 군대’였다.

지원자만 받아 정예병만을 남기는 고도의 훈련 기간은 모든 장교의 꿈 아닐까? 명령받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고도로 훈련된 사병 집단. 어떤 장교가 그런 부대의 지휘관 자리를 마다할까.
그런데 하인라인의 장교 양성에 대한 생각이 또 흥미롭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장교들은 모두 사병 출신이다. 어떤 나라의 어떤 군대든 장교는 따로 양성하기 마련인데, 하인라인은 사병이나 하사관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장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자신이 해군 장교였음에도 말이지.

군대에는 본래 장교 집단과 하사관 집단 간의 묘한 갈등과 알력이 존재한다. 이는 사병 집단도 마찬가지다. 명백한 명령 체계가 존재함에도 군대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경험치 - 전투력과 전투경험 - 때문에, 이 갈등은 군대 안에 신입과 고참이 있는 한,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인라인은 이 계급 간 갈등을 전 간부가 사병을 거치는 제도로 바꿔 소설 속에서 아예 없애 버렸다.
장교들이 사병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들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담지하고 있으며, 하사관들과 유기적인 호흡이 상시 가능한, 그야말로 패밀리화된 막강한 군대.
이건 정말이지…… 꿈에서나 가능한, 있을 수 없는 군대다. ㅎ

우리나라 군대를 생각하면, 할리우드 군인 영화에서 매번 강조하는 ‘명예’와 ‘충성’을 징병제로 강제 조달된 사병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애국심이 흘러 넘쳐, 혹은 내 가족을 내가 지킨다는 수수한 마음에 스스로 지원하는 모병제로 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렇다고 모병제가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군에 지원하고, 그들을 사회에서는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군대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병제인 미국의 군대가 그리도 명예를 아는 집단이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웠을 것이다)

더구나 하인라인은 군 내부의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내부의 경쟁심과 진급을 둘러싼 파워 게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군대를 만들었으니.

그럼에도 이 소설 속의 군대는 사실…… 매력적이다.
중세의 기사도를 확장한 ‘명예’와 ‘자부심’을 간직하고, 목숨마저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상관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는 동료로 둘러싸여 있는 군대라니. 이런 군대라면 명예롭게 전사할 용의마저 있다. ㅎ

문득, 궁금해진다.
‘파시스트들의 유토피아’를 그린 하인라인이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았을지.
다음에 볼 이 작가의 책은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 되겠구나.

by 신독 | 2009/09/28 09:57 | 궤적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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