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노작, ≪만들어진 한국사≫ by 신독


≪만들어진 한국사≫ 이문영 (지은이) | 파란미디어 | 2010-04-10


1980년대에 중고생 시절을 보낸 이라면, ‘민중사학’이라는 말의 어감을 기억할 것입니다. ‘재야사학’이라고도 불렸던 그것의 어감은 지금의 ‘유사역사학’과는 달리 상당히 신선하고, 매력적이었으며 당시에는 혁명적이기까지 했죠.

제가 처음 유사역사학을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 반의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교 선생님들은 진도 빠른 반과 느린 반의 학습 진도를 조절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레퍼토리를 갖고 있어야 했죠.
그때쯤 국사 선생님을 비롯하여 도덕 선생님, 국어 선생님이 비슷한 ‘역사 이야기’를 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식민 사관’의 비판, 일제에 의해 말살 내지 왜곡된 우리 고대사의 진실, 간도 수복…… 뭐 이런 얘기들이었죠.

선생님들이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은 다들 아시죠? (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선생님 이름이나 별명을 막 부르기 시작하는 게 우리네 사춘기 관행이긴 합니다만, 교과서 외의 이야기에는 귀를 활짝 열고 무비판적으로 고개 끄덕이는 게 그 시절의 순박함이기도 하죠.)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는 세칭 민중사학자들의 책이 본격적으로 나올 때라, 반 친구들 중에도 열변을 토하는 애들이 있을 정도였죠.
만화책에 그 이야기들을 모티브로 한 스토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 당시로 기억합니다. 박봉성 씨가 그런 류의 만화를 그렸던 것은 분명히 기억하고, 그 외에도 몇 분 더 계셨을 거예요.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잊힌 역사다! 같은 거였죠.

추석 연휴 동안, 데탑과 놋북 모두 조카들에게 빼앗긴 터라 1년 넘게 ‘읽자, 읽자’만 하던 이 책을 읽으니…… 그때 기억이 무럭무럭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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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1960년대의 미국이나 1970년대의 일본처럼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죠. 군사정권 타도를 위해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던 시기였고, 계급 문제와 민족 문제가 식자층의 주요한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광복을 맞은 후 곧바로 남과 북이 갈라서 한국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한국사회는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건설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자기반성의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죠. 완수하지 못한 과업(?)을 어떻게 반성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민족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근대를 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한국사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전근대와 근대, 현대의 모순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더구나 때는 1980년대. ‘통일’만 말해도 잡혀 들어가기 일쑤였던 독재의 시대입니다. 때문에 이 당시의 ‘민족’이란, ‘민중’이란 말 만큼이나 진보적인 어휘였어요.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아픔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1980년대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등장한 ‘민중사학’은, 가히 혁명적인 화두를 한국사회에 던졌죠. 우리가 이때까지 배운 역사는 모두 일제에 의해 날조된 역사이며, 지금의 강단사학자들은 식민사관에 물들어 식민역사만을 가르치고 있다고요.
≪환단고기≫니 ≪한단고기≫니 하는 책들이 그 잊힌 역사를 밝혀냈다며, 한국사회에 참으로 광범위한 여러 해악들을 끼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죠.

물론, 이에 대해 제가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전혀 못 느낍니다. 그저 이 책을 한 번 보세요. 10여 년에 걸쳐 유사역사학의 정체를 명쾌하게 논파한, 희대의 노작입니다. 이런 책이야말로 ‘문광부 추천 우수학술도서’로 지정되어야 할 책이죠.

이 책은 유사역사학이 실은, 국수주의 담론들인 중국의 ‘동북공정론’이나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임을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극우 파시스트라 생각한다면 모를까, 보수나 자유주의, 진보에 속한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만 유사역사학의 그물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이미 ‘역사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유사종교’가 되어 버렸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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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초가 그렇듯 ‘민족주의’도 처음엔 아름다웠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애국주의’의 모태가 될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어요.
하지만 근대를 넘어서며, 민족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의 침략도 정당화하는 ‘국가주의’ 내지 ‘국수주의’로 변질되어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을 탄생시키고 맙니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민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터라, 민족 국가 건설은 ‘통일’이라는 이슈로 지금도 진행형인 사회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근대적 과업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라 볼 수 있죠.
하지만 이 때문에 ‘국수주의’로 변질된 민족주의까지 지식인 담론에 무임승차가 가능합니다. 안타깝게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들이 ‘유사역사학’에 빠져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직도 한국사람에게 있어 ‘민족’이란, 애국심을 넘어 ‘통일의 당위’마저 불러일으키는 가슴 아픈 말이니까요.

그러나 민족의 당위에 눈이 멀어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극우 ‘국수주의’에 혹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더 유감스러운 것은, 대중문화의 종사자들이 이 ‘유사종교’를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차용하는 현실입니다.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치우’를 조상신으로 둔갑시킨다든지, 근대의 창작에 불과한 ‘주신’이니, ‘쥬신’이니, ‘배달’이니, ‘가림토’니 하는 것들을 우리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 너무 많이들 써먹고 있으니까요.

청산하지 못한 역사, 쪽팔린 역사를 화려하고 멋있게 치장한다고 우리의 현재가 자랑스러워지는 게 아닌데 말이죠. 과거를 거짓으로 미화하면 할수록 현재는 더 초라해진다는 것을 왜들 모르는 걸까요.
게다가…… 그저 ‘재미’ 때문에 ‘막 썼다’면, 그야말로 대대손손 욕먹을 짓인데 말입니다. ㅎ

덧글

  • 부기 2011/09/13 04:08 #

    대중문화 종사자들이 역사를 멋지게 치장해서 만들어내는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욕먹을 일도 아니라고 보고요.

    대중문화와는 별개로 제대로된 역사가 정립되고 교육되어야겠죠.
    그래서 대중문화를 접하고도 이 부분은 틀렸지만
    작가가 재미로 변형한거라고 일반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게 중요하죠.

    저도 신독님 말씀처럼 중고등학교때 역사선생님의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그런 선생님들 교육부터 다시해야되는게 아니겠습니까.
  • 신독 2011/09/13 08:41 #

    '개인적으로'라는 단서를 달았으니까요. 창작자 입장에서 본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랍니다.
    원론적으로는 부기 님 말씀이 옳죠.
    요즘 중고생들의 사정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 隕地 2011/09/13 08:25 # 삭제

    그 책이 '희대의 노작'이라니 칭찬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환단고기류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20여년전에 학계에서 논문 및 저서로 밝혀졌을 뿐더라

    '만들어진 한국사'는 이미 나온 성과들을 충실히 짜깁기한 책에 불과합니다



  • 신독 2011/09/13 09:13 #

    이 책은 개인의 저작물이기도 합니다만, 저자와 함께 의견을 나눈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노작'이란 '애쓰고 노력해서 이룬 작품'을 뜻하죠. 10여 년에 걸쳐 다수의 노고가 담긴 책이니, '노작'이라는 평가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희대'란 '세상에 드물다'는 뜻이고요.
    유사역사학의 탄생과 그 논리의 허구성, 유사역사학이 내포한 사상적 불온함을 450쪽 정도의 한 권으로, 총체적으로 비판한 책이 국내에 있던가요? 제가 알기로는 이 책이 최초입니다만. 그러니 '희대'라는 수사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인문학이란 본래 이미 나온 성과물들을 충실히 짜깁기하여 새로운 시야, 새로운 전망을 도출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 논문들의 주석이 온통 참고도서 인용으로 도배되다시피 하는 건 그 때문이죠. 유사역사학이 실은 극우 파시즘에 복무하는 유사종교임을 '충실한 근거'들로 조목조목 밝히고 있으니, 학술서로써도 당연히 평가받을 만하다 생각하고요.
  • rhdxogns 2011/09/13 10:06 #

    그냥 차라리 역밸로 보내지 그러셨습니까. 엄청난 지지와 어그로를 끌었을 겁니다............
    아, 책 이외의 자료를 원하시면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작가 본인께서 많은 자료를 쌓아놓으셨습니다.
  • 신독 2011/09/13 10:12 #

    책 감상은 도서로 보내는 게 역시 맞다 생각해서요. 이 블로그에 쓰는 책 감상은 대부분 도서로 보내기도 하고요.
    역밸은... ㅎㅎ 말씀하신 대로 어그로 때문에...; 저도 나름 바쁜 사람이거든요. ㅋ
  • exnoy 2011/09/13 11:33 #

    이 글이 역밸로 올라갔으면...어휴.
  • 신독 2011/09/13 11:36 #

    에... 종교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지 말입니다;;;
  • 2011/09/15 11:2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11/09/15 18:13 #

    제가 일일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만 있었어도 그 점을 꼭 언급했을 텐데 말이죠. 쩝.
    이 책 덕분에 간만에 정말 뿌듯한 독서를 했답니다. ^^/
    증보판이 꼭 나왔으면 하는 책이고, 좀더 강력한 일갈이 실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 글쎄요 2011/10/15 18:34 # 삭제

    이병도와 그의 후학들이 세워놓은 지식 기반 위에서 중립이니 뭐니를 외치는 일은 공허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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