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무대를 장악한 퇴장 by 신독

안철수 씨의 서울시장 불출마 선언 이후, 각종 뉴스매체에서는 '5일 만에 막 내린 안철수 돌풍'류의 기사를 신 나게 양산하고 있습니다. 실로 오랜만의 호재인 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참으로 오랜만에 시사 관련 글을 쓸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진 경우, 두 가지 종류의 기사들이 연달아 쏟아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는 각 정치 세력의 역관계와 풍향을 언급하며 미래의 지형을 예측하는 기사들입니다.
'한나라 역습 준비', '민주 긴장', '안철수 대선 노리나', '박풍 잠재울까', '대선 후보는커녕 서서히 잊힐 것' 등등의 기사들이겠죠. 독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기사들이기도 합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거든요.

또 하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사건을 사회현상으로 간주하여 그것이 야기된 사회적 본질을 진단하는 칼럼들입니다.
안철수 씨 본인의 "제게 보여준 기대 역시 온전히 저를 향한 게 아니라 우리 사회 리더십에 대한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 여긴다"는 말 또한 이에 해당한다 볼 수 있겠죠.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 기성 정당정치에의 환멸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외의 것들을 하기 위해, 많은 칼럼니스트들은 이념에 따른 잣대를 적용하여 사회를 구획하고, 그 안에 해당 사건의 주인공들을 배치하곤 합니다.
이 작업은 사실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의 시놉시스 작성 단계와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관을 만들고 캐릭터를 배치하여, 그들에게 행위의 동기들을 부여하는 것이 시놉시스 작업의 일부니까요.
그리고는 특정한 '상황'을 등장인물들 사이에 던져 주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캐릭터에 따라 그 상황에 접근하며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바로 '사건'이고요.

안철수 씨는 사실상 한국사회의 이념적 구분 자체에 의문을 던졌습니다만, 칼럼니스트분들은 여전히 '보수-진보' 내지 '보수-자유주의-진보'의 이념적 구분으로 안 씨를 기존 세계관 속에 배치하더군요.
하나의 세계관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소설이나 영화는 어지간히 대박을 치지 않은 이상에는, 대다수의 독자 내지 관객들이 질려하기 마련입니다. 재미가 없거든요.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내지 "우리 시대의 보수 - 진보 구분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말은 분명히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젠 재미가 없어요.
이미 보수든, 진보든,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다 똑같은 넘들'이라는 체념적 분노가 한국사회의 구성원 사이에는 만연해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안 씨의 등장이 그렇게도 참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상 박찬종 씨나 문국현 씨의 등장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에도, 단번에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보였던 것은, 등장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 자체가 낡았다는 반증에 다름 아닙니다.

뭐, 세계관 짜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저도 잘 압니다. 맨날 하는 일이 그거니까요. 하지만 낡아도 너무 낡았잖아요. 보수, 진보 얘기가 도대체 언제적 겁니까... 이미 20년 가까이 우려냈으니, 물렁뼈조차 안 남았겠어요.

안철수 씨는 역시나 영리하고도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기존 정치권이나 언론이 '보수-진보' 내지 '인물 검증' 등의 흔하디 흔한 '신참 길들이기' 레파토리를 꺼내자마자, 유유히 무대에서 퇴장하셨잖아요. 재미있는 거 잔뜩 보여주고, 재미없는 얘기는 너네들끼리 하라면서요.

결국 대다수의 저 같은 사람들은 안 씨의 정치관이나 이념에 관계없이 그의 다음 등장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아쉬움과 기대감을 잔뜩 안기고 멋진 '가오'만 남기고서 무대를 내려갔으니까요.
이제 무대에 남아 있는 이들은 중량감 넘치는 중견들이나, 이미 무대의 주도권과 존재감은 안 씨가 장악한 격입니다.

그분의 지난 5일간의 행보가 철저히 계획된 것인지, 우연이 유발한 자연스러운 행보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한국사회 만방에 뚜렷하게 각인시켰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실로 기대되는군요. 앞으로 안철수 씨가 어떤 정치 행보를 걸을지가.
기업인으로서 제3정당을 창당하려 했던 실패의 선례들이 이미 존재하니, 철저한 분석을 통해 치밀한 대응 전략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V3 또한 그렇게 탄생했다 알고 있으니까요.

덧글

  • 라라 2011/09/07 10:42 #

    그분의 지난 5일간의 행보가 철저히 계획된 것인지, 우연이 유발한 자연스러운 행보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둘의 차이는 크다고 보여지는군요

    전자면 제 3당 창당까지 기대, 후자면 단순 해프닝

  • 신독 2011/09/07 10:51 #

    지금까지 내비친 말로는 전자일 가능성이 큰 듯하죠.
    저는 안철수 씨 개인 내지 진영의 속내가 아니라 한국사람들에게 준 인상을 기준으로 말한 거니까요. 계획이든 우연이든 앞으로의 정치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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