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출판사가 안티? 《상복의 랑데부, 코넬 울리치》 by 신독


《상복의 랑데부 Rendezvous in Black》 코넬 울리치 저 | 김종휘 역 | 동서문화사 | 2003.01.01(중판, 원작 1948) | 페이지 320

놀랍다.
이 책이 동서문화사에서 처음 나온 것은 1977년이다. 26년이 지나 2003년에 중판을 또 냈고. 1989년에 일신서적에서도 번역서를 냈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독자들은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으로 <상복의 랑데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들 대부분이 출판사가 뒤표지에 당당하게도 인쇄해 놓은 최악의 스포일러에 당했을 것이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부디, 뒤표지를 보지 말고 글을 읽으시기를. =.=)

<상복의 랑데부>에서 연속살인의 진정한 동기가 밝혀지는 부분은 글이 거의 끝나가는 294쪽이다. 연속살인의 동기 자체가 글의 중심 플롯을 이루는 ‘미스터리’인 것이다. 만화 <올드 보이>의 범행 동기가 너무나 하찮은 이유(범인에게는 너무나 중요했지만)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상복의 랑데부>의 범행 동기도 무심코 행한 실수가 연속살인을 가져왔다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그런데 동서문화사의 뒤표지에는 ‘반전’ 역할마저 하는 이 핵심 정보가 너무나 당당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건…… 미스터리 영화를 관람하려 할 때, 먼저 영화를 보고 나오던 관객이 “범인은 장님 여자야!”, 외치고 도망가는 것과 같다.
최악의 스포일러를 출판사가 한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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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용대운 님을 뵈었을 때, 그때까지 너무나 궁금해했던 것을 여쭤볼 기회가 있었다. 바로 대만의 무협 작가 고룡과 하드보일드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의 연관성이었다. (참고, ☞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감상 )

국내 무협 작가들 중 고룡의 작풍을 가장 인상적으로 계승한 분답게, 용대운 님은 “고룡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서만 영향을 받은 게 아니랍니다”라시며 몇몇 작가들의 이름을 연달아 언급해 주셨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나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들에 대해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할 때라서, 레이먼드 챈들러 외에는 내가 아는 이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한다. 그때 내가 알아듣지 못한 이름들 중, 윌리엄 아이리시나 그의 또 다른 필명인 코넬 울리치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고룡이 창조한 주인공들은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기사도(중국식의 협의와 비슷한)를 갖고 있기도 했지만, 이전의 중국적인 협객들이 가지지 못한 묘한 애수를 간직한 인물들이다.
이 애수는 중국적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이었고, 전근대적이라기보다는 ‘도시적’이었다. 영화 <비트>에서 정우성이 보여 주었던 ‘고독한 도시 젊은이’의 애수와 비슷하달까.

나는 고룡의 이 도시적 ‘애수’가 아마도 코넬 울리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중이다. (뭐, 어디까지나 아직은 짐작일 뿐이다. 미국의 하드보일드와 중국무협을 비교연구하는 비평서적이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스스로 해답을 얻는 수밖에 없겠지만.)



<상복의 랑데부>에는, <환상의 여인>에서 잠시 보여주었던 코넬 울리치의 ‘도시적 애수’가 살인자 조니를 후광처럼 감싸고 있다.
미스터리 특유의 강렬한 반전이나, 추리게임을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실망을 줄지도 모르겠지만, 특정 장르의 규범을 의식하지 않고 ‘감성’만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최고의 만족을 줄 만한 글이다.

조니의 변화 과정(순진한 도시 청년이 어떻게 옴므 파탈의 위력을 보일 수 있는지)이 담기지 않아, 개연성의 허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 감성이 담긴 글이라면 코넬 울리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는 게 당연하다 생각된다.

출판사의 스포일러만 아니었다면, 아이러니가 담긴 반전을 참으로 근사하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이 책을 안 보신 분은 부디 뒤표지의 소개 문구(출판 쪽에서는 '표사'라고들 하던데, 표준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쇄 쪽 외래용어거나 한자의 오독일 가능성도 있겠다. '표지에 쓰다'는 뜻의 한자어가 아니면, 겉표지를 구획한 표1,2,3,4 중 표4일 수도 있을 듯. 일본어도 아닌 모양이던데, 어원을 모르겠더라)를 읽지 마시길 바란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주문일 테지만. ㅎ

이 정도 실수라면, ‘출판사가 안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