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비밀을 알고픈 '시커'들에게만 추천 - 《실크로드, 움직이는 과거》 by 신독

《실크로드, 움직이는 과거 (문명교류에 대한 대위법적 에세이)》 차병직 ․ 문건영 저| 강 | 2007.12.31 | 페이지 403

대위법이란,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을 말합니다. 이 책은 두 저자인 차병직 씨와 문건영 씨의 독립된 여행기를 하나로 엮었으니, 실로 잘 어울리는 부제라 할 수 있죠.

여행을 위해 나름의 정보 수집을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곳을 방문한 선객들의 기록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숙박 현황이나 교통편, 지도나 기후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보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인터넷상의 감상문들을 보아도 ‘여행기가 왜 이렇게 어렵냐’는 감상들이 꽤 있는 책이니까요.

이 책은 실크로드에 담긴 ‘비밀’을 엿보고 싶어 하는 <시커(Seeker: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 ‘구도자’쯤 되는데, 어감이 많이 다르지요)>들에게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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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좋아하시는 분이나 오지 여행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산악인이자 모험가인 라인홀트 메스너(1944- )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 낭만적인 이탈리안 노선생은 글발 또한 대단한 분이라 이렇게 멋진 문장도 쓰셨죠.

“이 지구상에서 거칠다고 여겨지는 구석들은 그사이에 대부분 개방되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접근 가능한 곳은 단지 장소일 뿐이다. 그 장소가 지닌 비밀들에는 관광객들이 다가가지 못한다. (이 책, 25쪽에서 재인용)”

많은 관광객들이 풍경에 감탄하며, 유적이나 낯선 풍물에 경탄하며 여행지를 스쳐지나갑니다만,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역사가 담겨 있는지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는 한, 거의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 책의 두 저자들처럼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역사 공부를 하더라도 종내 잡히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죠. 그것은 여행자들이 보는 그 이국적인 풍물을 만들었을, 그 신비로운 경관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했을, 그 시대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미스터리를 라인홀트 메스너는 ‘관광객은 다가가지 못하는 비밀’이라 오연하게 표현했죠.

두 저자는 실크로드에 담긴 이 ‘비밀’에 숱한 관련서적의 탐독과 함께 ‘문학’을 통해 접근했습니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누란>과 <홍수>, 김별아의 <삭매와 자미>,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을 나침반 삼아서요.

소설이란 본래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을 ‘보여주는’ 문학입니다. 때문에,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으로 창조된 고대인의 삶은 때로 ‘거의 진짜 같네’를 넘어 실제를 목격한 듯한 생생한 감동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그런 경험을 한 듯 보이고요. 저 또한 그들 덕분에 비슷한 간접 체험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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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는 중국과 아랍, 유럽을 잇는 고대의 무역로쯤으로 여겨지는 <실크로드>는 동대륙과 서대륙 간의 문명 이동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닷길이 열리며 육지의 실크로드가 끊어지고, 유럽과 아시아의 교통이 중단되어 총과 대포로 다시 열리기 전까지, 고대의 문명 교류는 실로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습니다.

신라의 화랑이 사신 일행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혜초대사를 수행하여 서역(지금의 신장위구르자치구)을 지나 인도까지 여행하고, 그곳에서 사귄 아랍인의 전투에 동참하여 동유럽의 비잔티움까지 말발굽 달려 질주하는 모험 이야기가 이 시대에는 가능했습니다.(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가 방금 만든 이야기입니다. 둔황의 막고굴에는 화랑모를 쓴 신라 화랑도, 중국과 스리랑카를 거쳐 아프가니스탄과 파미르 고원까지 구도행한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대사도 벽화로 존재하니까요.)

‘민족주의’란 사실 근대의 발명품이고,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고대인들끼리의 교류는 매우 자유분방했습니다. (때로 창칼을 동반하기도 한 자유였지요.) 아마도 실크로드를 오갔던 당시의 그들에게는 ‘국가’와 ‘민족’이란, ‘고향 혹은 고향 사람들’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국가주의 시대를 답답해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옛날이지요.

‘민족주의’의 창으로 실크로드의 비밀을 엿보면 동유럽에까지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 있다' 볼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인’이었고, 문명 교류의 담당자였을 뿐입니다. 지금의 창으로 고대를 보려는 시도는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고 말죠.  (둔황 막고굴의 벽화 중에는 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문 또한 동서 교류의 생생한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증거 삼아 고대 우리 민족의 예술혼이 중국과 서역을 넘어 헬레니즘 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해한다면, 실크로드를 넘나들었던 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슬픈 오해겠지요. 그들에게는 문화 창조 선후의 가름 자체가 무의미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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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실크로드’는 사실 중국의 간쑤성과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넘지 않습니다. 시안에서 출발해 카슈가르에서 회유하는 여행기니까요. 그러나 둔황의 모래바람과 막고굴,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들이 품고 있는 전설과 역사가 문학의 창을 통과해 아련하게 펼쳐집니다.

단련된 독서가가 아니라면, 분명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기의 필수라 할 사진이라 봐야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그것도 몇 장씩 한꺼번에 올라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온통 빽빽한 문자로 가득한 인문학 서적에 가까운 여행 에세이니까요.

그러니... 서역의 진정한 ‘비밀’을 엿보고 싶은 ‘시커’들, 실크로드를 작품 속에 담아보고 싶은 창작자들에게만 강추합니다. 이 책의 맨 뒤에 실린 참고문헌에는 실크로드에 관한 서적 80여 권이 5쪽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참고서적으로써도, 그 안내서로써도 손색이 없는 실로 단단한 책이랍니다.

이런 책이야말로 ‘문향文香’이 가득하다 평해야겠지요. 멋진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