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의 걸음과 셋의 걸음 by 신독

폐를 끼칠 지도 몰라 덧글에서는 더 여쭤 보지 못했지만, 여기야 뭐 무술하는 분들이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고, 밸리 발행도 안 할 테니...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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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견 품밟기를 처음 배운 시기는 한창 산을 타고 다니던 97년 무렵이었다.
그때는 산에서 떨어지기 전이었던 지라, 지금처럼 왼발잡이가 아니라 오른발잡이였고, 고관절도 부드러운 편이라 걸음걸이 균형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때다.

대학 후배 중에 지금의 '대한택견협회' 쪽에서 택견을 배우던 친구가 있었다.
아쉽게도 몸이 한창 성장하던 때 그만두긴 했지만 5년 정도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에, 택견 발차기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지사.
그 친구한테 대한택견협회 쪽에서 가르치던 허리를 내미는 품밟기나 발질 몇 개를 배웠다. 재미있더라.
품밟기의 굼실대는 중심이동이 그때 내 몸에는 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내게 워킹의 맛을 가르쳐 주신 분은 97년에 도봉산에서 만난 노인이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몸에 관련된 공부를 하신 분이 아닌가 싶다. 머리가 하얗게 새셨는데도 허리가 곧았고, 눈빛 또한 또렷하셨다. 평일 오전에 산을 타다 우연히 하루 종일 동행하게 되었고, 귀여우시다며(당시엔 내가 좀 귀여웠다. ㅎ) 산행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다. 그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워킹의 맛을 모르면 산을 제대로 못 타요."

그분이 가르쳐 주신 '워킹법'의 원리는 사실 간단하다.
걷는 도중, 무릎을 완전히 펴지 않는다. 상하 중심 이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평행으로 좌우 중심 이동을 하며(이건 중국 무술 전반에 걸친 기본 신법이기도 하다) 산을 오르고 내려간다.
이렇게 걷기 위해서는 발목과 무릎, 고관절의 스프링을 리드미컬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품밟기의 중심이동이 몸에 자연스러웠던 것도, 산을 탈 때의 내 리듬과 너무 잘 맞아서였다.

산에서 떨어진 후, 몇 차례 수술을 거치면서 나는 관절의 탄력과 몸의 균형을 잃었다. 오른쪽 발목뼈가 부서져 스프링의 한 축을 잃으니, 연쇄반응으로 균형이 무너지더라.
균형을 회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고가 난 후 10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제껏 알고 지내던 지인이 요가를 제대로 배운 이라는 것도 그때쯤 알았고, 그에게 심결을 배운 후부터 산을 타고 덤벨 운동하고 요가를 하며 균형을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잃었던 탄력이 돌아오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처음 도봉산, 사패산 종주에 성공했을 때도 고정된 오른 발목의 여파로 왼발은 내전을 하고 있었다. 그 발목으로는 8시간 이상은 산을 못 타겠더라.

그때쯤 한도사 님 포스팅에서 품밟기에 대한 짧은 언급을 보았다. 대한택견협회 쪽이 아니라 결련택견협회 쪽의 품밟기를 말씀하신.
인연이 있었는지, 내 주위엔 결련택견협회가 '택견계승회'로 활동할 때 도기현 선생에게서 사사한 지인이 있었다.
그에게 품밟기를 배우며 의아하더라. 97년에 배웠던 품밟기와는 몸 쓰는 법이 사뭇 달라서.
몸 균형 찾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배우고 싶다는 말에, 그가 내게 가르쳐 준 품밟기는 기본밟기와 넓게 밟기(요즘 결련택견 쪽에선 옆째밟기와 앞째밟기로 나누어 가르치는 모양이더라) 딱 두 종류였다.
예전에 들은 풍월이 있어 활개짓에 대해 물었더니, 결련택견 쪽에선 활개짓을 그다지 중시 안 한다고 했다.
품밟기의 보폭이 그렇게 넓은 줄도 그때 알았다. 그가 넓게 밟기를 할 때는 휙휙 몸이 좌우 전후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으니. 바로 눈앞에서 그 정도 스피드와 보폭으로 이동하면, 상대의 눈에는 휙하고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택견꾼들끼리 붙는 게 아니라면, 그 보법만으로도 굉장하겠다 싶었다.
내 보폭이 굉장히 줄어 있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골반이 그렇게 굳어 있었다는 것도. ㅎ

그리고 2년쯤이 흐른 것 같다.
이것저것 속 녹이는 일들이 생겨 거의 잠수만 하며 보냈던 세월이었지만, 몸 쓰기 좋아했던 기질은 사라지지 않아 중단했다 다시 했다 하면서도 운동은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 왔다.
요가나 덤벨 운동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걷기나 달리기, 산타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딱히 품밟기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덤벨 운동 중간 휴식 시간이나, 걷기나 달리는 중간, 산 타는 중간중간 품밟기는 꾸준히 해왔다.)

작년쯤, 산을 오르는데 감각이 왔다. 산이 발을 밀어주는 듯한 느낌이.
그때 이후로 조금씩 탄력을 느끼며 산을 타게 되었다. 예전 한창 때의 속도는 지금도 안 나오지만, 지난 10년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균형감을 느끼며 산을 탄다. 발목 때문에 내리막길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그동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 내리막길에서도 탄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러다 오늘 한도사 님 포스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품밟기는 워킹 런지의 버라이어티판이라고 생각한다."

런지는 서 있는 상태에서 한쪽 발을 쭉 뻗어 무릎을 굽히면서(굽힌 무릎이 발을 넘으면 안 된다) 반대쪽 무릎을 지면에 닿을락말락하게 내리는 동작이다. 위킹 런지는 이 동작을 걸어가면서 한다. 덤벨을 들고 하면 덤벨 런지, 바벨을 메고 하면 바벨 런지다.
저 구절을 보며 '아!' 했더랬다.
기본밟기를 할 때는 못 느끼지만, 넓게 밟기를 할 때는 확실히 런지의 자세가 나온다. 바로 앞이 아니라 비스듬히 정삼각형의 품을 밟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마르스 시절부터 눈팅만 했던 독자였지만, 처음으로 덧글을 달았다. 그만큼 감탄했던 구절이었다. 워킹 런지와 품밟기가 연결된다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서.
그런데 답글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저는 품밟기가 구궁보의 변형된 형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 구궁보가?
더 여쭤 보고 싶은 게 층층이 꼬리를 물었지만, 아래 답글에 체육계 쪽 논문 도용에 대한 답덧글이 있어, 꾹 참았다.
여기야 내 집이고, 책에 대한 포스팅을 주로 하는 곳인데... 여기 설마 체육계 쪽 분이 오실 리야 없겠지. 무술 하는 분도 그렇겠고.

글쓰기에 전공 장르를 정하는 것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내가 처음 글을 써본 것은 무협이었고 지금 쓰는 글도 무협인지라, 나는 무술서적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헌책방 가는 게 취미 중 하나인데, 헌책방 가면 꼭 있는 게 예전에 나온 각종 권보들이다. 그렇게 하나둘 사다 보니, 나는 근대에 성립한 내가삼권의 권보를 모두 갖고 있다.
구궁보는 내가삼권 중 가장 나중에 성립한 팔괘장의 수련법이다.
구보와 파보, 투보와 병보의 네 가지 걸음에 앙장, 부장, 입장, 포장, 벽장, 요장, 도장, 나선장의 여덟 개 장법을 펼치며 아홉의 기둥을 도는 것이 구궁보 수련이다. 구궁보는 중간에 태극을 두고 그 주위에 팔괘를 배치하여 아홉 개의 기둥 주위를 돌거나 기둥 위를 돌면서 수련한다.

결련택견 쪽 품밟기를 배우고, 동영상을 찾아 보다가 내가 제일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도기현 선생의 활개짓이었다.
고 송덕기 옹은 "택견은 품밟기가 전부"라며 활개짓을 중시하는 신한승 선생에게 역정을 내셨다는데... 정작 도기현 선생의 품밟기를 보면 대개의 택견꾼들이 좌우로만 슬쩍슬쩍 흔드는 활개짓과는 완전히 다르다.
손가락을 펼친 손 모양은 중국 무술의 장이고,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양팔의 궤적은 완연히 장법의 그것이다.
한도사 님은 예전의 책에서도 도기현 선생이 배웠다는 택견의 옛법이 자신이 배운 '호장'과 기술체계가 동일하다 언급하신 적이 있다.

요즘은 결련택견 쪽에서도 활개짓에 이름을 붙여 수련하고 있나 보던데, 품밟기에도 결합시켜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배워 하고 있는 두 종류의 기본적인 품밟기나 일반 수련자들의 품밟기 동영상을 보면 도기현 선생 같은 활개짓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도기현 선생의 그 활개짓은 아무리 봐도 '장법'이다.
그렇다면 활개짓이 가미된 결련택견 쪽의 품밟기는 정말로 구궁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구궁보는 보법과 장법을 함께 수련하는 동공이기 때문이다. 장법인 활개짓과 보법인 품밟기의 결합 형태는 팔괘장을 몸으로 익혀 보지 않은 내가 봐도 구궁보와 비슷한 면이 있다.

20대 때 신진대사가 왕성할 때는 몰랐지만, 장년이 넘어 신진대사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요가의 힘을 절실히 느끼겠더라. 무협에서 신비화된 내공이란 몸으로 느낄 때는 사실 그다지 신비스럽지 않다.
사람의 몸이란, 몸 안에서 힘을 돋워 주는 자세들이 따로 있달까. 그 자세들은 자연스럽게 복식호흡을 유도해 주고, 몸 안에서 기운을 돋워 전신으로 흐르게 해준다.

ITF 태권도에는 중국 무술의 침추경(발경 원리 중 하나)과 비슷한, 힘을 돋워 주는 체계가 있다. 외국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사인 웨이브'라 불리는 그 동작이 재미있어 나는 그것을 따라해 보았다. (몸을 낮추며 힘을 돋우는 기법이니, 침추경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정권 지르기야 고관절 다 굳었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어깨 관절은 다치지 않았기에 지르는 법마저 잊은 것은 아니더라.
마보만 한 채 사인 웨이브를 따르며 정권 치기를 해 보면, 사인 웨이브가 기운을 돋워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이 가능하다. 태권도 수련자라면 금세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결련택견의 품밟기도 마찬가지다. 품밟기를 하지 않고 산을 탔을 때와 품밟기를 하고 난 후 산을 탔을 때는, 몸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다른 스트레칭으로는 얻을 수 없는 몸 안의 힘을 돋워 산행을 할 수 있으니.
아마도 내 몸이 균형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느끼지 않나 싶다.
내 경험으로는 품밟기는 확실히 동공이다. (다른 내가권은 수련해 본 적이 없어 비교를 못하겠다. ITF 태권도의 사인 웨이브도 수련 기간이 짧으니 뭐라 더 할 말이 없고. ㅎ)

그렇다고 뭐... 청나라 말 성립한 팔괘장의 구궁보와 조선 말기의 존재만 확인된 택견의 품밟기가,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지 탐구해 볼 마음은 없다.
이걸 갖고... 보라, 택견의 품밟기가 발전해 팔괘장의 구궁보가 된 거야! 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아, 많이들 있겠군. =.=)
천지인 삼재와 음양오행과 팔괘의 철학적 원리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해 주어도... (음... 팔괘에서 오행을 빼면 삼재가 나온다고 할 지도... 쿨럭;)

동영상으로 본 중, 가장 역동적이었던 품밟기 하나 살짝 올리며 쓰잘데기 없이 긴 글, 마무리하련다.
(내가 택견꾼이 아니라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분이 정말 고수시라는 것만은 나도 알아보겠더라.)



올리는 김에, 구궁보와 팔괘장 동영상도 하나. (어느 팔괘장인지까지는 모르겠더라.)


덧글

  • 운동과느낌 2011/04/22 14:18 # 삭제

    안녕하세요?
    걷기 등 몸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택견의 품밟기에 관심이 있어서 검색하다가
    이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말씀하신 품밟기동영상을 볼 수가 없네요.
    혹 찾을수 있는 경로나 키워드를 알 수 있을까요?

    결련택견이 원형의 택견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결련택견에서 하는 품밝이의 요령을 알 수 있을까요?

    송덕기 옹과 박종관 씨가 쓴 택견이란 책을 보았는데
    그것만 봐서는 잘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 신독 2011/04/24 11:58 #

    구글 검색에서 '품밟기 결련택견협회'로 동영상 검색을 하시면, 몇 개의 동영상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google.co.kr/search?hl=ko&biw=1377&bih=890&q=%EA%B2%B0%EB%A0%A8%ED%83%9D%EA%B2%AC%ED%98%91%ED%9A%8C%20%ED%92%88%EB%B0%9F%EA%B8%B0&um=1&ie=UTF-8&tbo=u&tbs=vid:1&source=og&sa=N&tab=wv
    대한택견협회쪽의 품밟기는 각종 포털에서도 쉽게 찾아보실 수 있고요.

    보법에 관심이 있으시면, '동이택견'으로 알려져 있는 '수밝기'의 본때도 찾아보시고요. 구글 동영상 검색을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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