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지 마라, 크로캅. 그것은 당신의 길이 아니다 by 신독

어릴 때 산을 처음 배울 때는 올라가는 게 더 힘들었다. 하산할 때야 건강했던 관절들 덕분에 통통통, 잘도 달려 내려왔고.
발목, 무릎, 고관절로 이어지는 충격 분산의 메커니즘이 망가진 이후로는 하산이 더 신경 쓰인다. 어느 정도 균형이 회복된 요즘에도 그것은 마찬가지. 올라갈 때야 숨이 턱에 차게 달리기도 하지만, 내려올 때면 결혼식장 신부처럼 조신하게 움직인다. 발목과 무릎, 고관절과 대화라도 하듯 몸의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대개 나이를 먹은 산꾼일수록 하산 시 천천히 움직인다. 오르막보다는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고 조심할 길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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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크로캅과 프랭크 미어의 UFC경기를 보니 착잡하더라.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파이터였던 크로캅의 내리막길은 험난하고도 비참했으니. 앤디 훅과 찍어차기를 교환하고 하이 파이브를 나누던 호탕함은 깊게 패인 주름들과 함께 숨어 버렸던가 보다.
3라운드에 프랭크 미어에게 니킥으로 실신 KO패를 당한 후, 크로캅은 언론에 이런 말을 흘렸다.

너무 비참하다. 어딘가에 숨고 싶다.


KO당하기 전, 경기장에서는 관중들의 야유가 흘렀다. 왼손잡이끼리 붙었다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지루한 경기였으니. '불꽃 하이킥'이라 불리던 호쾌한 파이터의 대명사 크로캅이 경기 중 야유를 받을 지경이 된 것이다. 이게 무슨 영락이란 말인가.
경기 전, 프랭크 미어는 크로캅의 부상 의혹설에 '또 변명을 준비 중'이라며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크로캅이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되다니.

2007년 가브리엘 곤자가에게 하이킥으로 실신 KO패를 당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발목이 완전히 꺾여 버린 채 기절한 크로캅이라니.
누구나 바랐을 것이다. 크로캅이 자신이 걸어왔던 파이터 인생의 궤적을 따라 또다시 멋진 재기에 성공하기를.
칙 콩고에게 질 때만 해도 철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 위안 삼기도 했으나... 링으로 돌아가 오브레임과 붙었을 때도 시원함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예전의 빠르고 날카롭던 크로캅은 그곳에 없었다. 게다가 2009년 도스 산토스에게 실컷 두드려 맞다 기권패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안습이었다.

크로캅이 체급을 내리고 전술을 바꿔야만 UFC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사도 보았지만, 전성기 때의 크로캅에게는 체격의 차이나 전술의 노출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커다란 덩치의 밥샵을 농락하듯 때려 눕혔고, 그때도 뻔했던 크로캅의 전술을 연구하고 링에 올랐던 상대들은 알면서도 크로캅의 하이킥에 당하곤 했다. 마크 콜먼을 링 사이드에 몰아넣고 왼손 훅과 어퍼컷으로만 쓰러뜨렸던 크로캅 아니던가.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크로캅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말았다. 함께 프라이드를 주름잡았던 표도르나 노게이라와 비교한다면 너무 이르다 말할 정도로. 스타일의 탓이 제일 컸겠고, 연이은 패배를 극복하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가 꺾여 버린 파이터는 다시 싸우지 못한다.
크로캅은 누가 보아도 이제 내리막길이다. 사람에 따라선 막장이라 보기도 하겠지만.

프랭크 미어 전에 앞서 "어떤 경기든 마지막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K-1에서 33경기, 종합격투기에서 37경기, 아마추어 복싱에서 44경기를 했다. 그 누구도 나처럼 경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남은 어떤 경기든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아직까지 케이지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파이터로서의 투쟁심인지, 자존심인지, 아니면 돈인지.
기회를 준 UFC와 팬들을 위해서라 그는 말했지만, 기대가 한숨으로 바뀌는 되풀이가 팬으로서는 달갑지 않다.
UFC가 K-1처럼 은퇴경기를 따로 마련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위태위태한 내리막길을 무작정 달려 내려가는 것보다는 그가 원했던 대로 레전드가 된 파이터들 중 한 명과의 은퇴 경기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결정은 온전히 그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어딘가에 숨고 싶다'고 말하는 크로캅을 보고 싶지는 않다.
수많은 격투팬들의 피를 끓게 했던 그답게 멋지게 퇴장하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
그의 입장곡인 '☞ Wild boys'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Wild boys, never lose it.
Wild boys, never chose this way.
Wild boys, never close your eyes.

더 지지 말라고는 안 하련다. 이제는 언제 누구에게 져도 이상하지 않은 내리막길이니까.
하지만, 숨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의 길이 아니다.
내리막길이지만 겁내지 마라, 크로캅.



덧글

  • 강희대제 2010/09/29 19:10 #

    불상한 크로캅..
  • 신독 2010/09/30 09:32 #

    영 기분이 그렇더만요.
  • 욕구不Man 2010/09/30 18:10 #

    구로갑 의원님이 이렇게까지 몰락했군요...
    UFC안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더니 ㅠㅠ
  • 신독 2010/09/30 22:05 #

    요즘은 영 안습이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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