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 헤어진 연인 - 중국고대지명대사전 by 신독

글 쓰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작가란, 헤어진 연인과 비슷한 존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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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석의 재미를 처음으로 느낀 책은 동양학 서적인 《여자란 무엇인가? 김용옥》이다.
김용옥 씨의 글쓰기는 본론보다 재미있는 군소리가 많은 편인데, 학술서적을 다루는 주석의 abc를 잘 지키면서도, 본편에서는 못 담는 이야기들을 주석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곤 했더랬다.

하지만, 소설의 주석에는 회의적인 편이었다.
이야기인 소설의 흐름을 주석이 깬다고 느낀 책들이 꽤 많았으니.
그런 편견을 처음으로 깨 준 소설은 송경아 씨가 번역했던 《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이었다.
재스퍼 포드가 직접 단 주석보다는 역자인 송경아 씨가 단 주석이 더 많았는데도, 나는 그 주석들이 이야기와 함께 읽혔고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 책을 보니 '나도 주석을 단 소설을 써 봐?'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던 어느 날, 판타지 소설인 《열왕대전기, 강승환》를 보게 되었다.
그리 많은 주석이 달려 있지는 않았지만, 각주가 아니라 미주로 처리해 장의 끝에 재미있는 주석들을 달았더라. 설정이나, 무기 등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주석을 단 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ㅎ

소설 속에서야 장르가 무협이니, 중국 지명을 우리식으로 얼마든지 읽어도 된다. 1911년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 지명이나 인명은 우리식 한자 독음이 표준어니까. 사천, 운남, 공격이산, 모사탑격산 등등.
하지만... 주석의 시점은 2010년 현재.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천이나 운남은 그냥 넘어간다 해도, 독자 대중이 잘 모를 공격이산이나 모사탑격산은 병음을 우리말로 표기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니 꽁꺼얼산, 무스타꺼산. 덕분에 중국어사전 찾아가며 무협을 쓰게 되었다. ㅎ

본론에서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중국의 지도를 보며 무협을 쓰는 사람에게 구글 지도는 가히 혁명적 변화를 안겨 주고 있다. 위성 사진과 지도를 함께 제공해 주니.
간자에 겁먹지만 않으면, 이제는 거리까지 정확히 측정 가능하다. ㅎ
구글의 중국 지도가 로드뷰까지 장착한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도 있겠지. (중국 정부는 사진 규제가 좀 심하려나.) 이제는 중국의 옛 지명까지 검색이 가능한 세상이다.

☞ 여기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
하단의 '輸入名稱條目'에 검색하고픈 지명을 치면 시대별 지명이 뚜루루 나온다. 물론 다 한자.

문제는 이놈의 주석 때문에 글 쓰는 속도가 좀체 안 붙는다는 점.
처음엔 무협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설정을 알려주는 기분 정도로 달았는데, 사천이나 신강 등 변방을 다루다 보니 낯선 지명에도 주석을 달게 되었다.
구글 지도로 위성 사진을 보다 보니... 전에 썼던 분량의 치명적 오류도 발견하게 되었고. (뭐, 직접 가 보신 분들이나 아실 오류였지만... 알면서 고치지 않을 수는 없는 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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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헤어진 애인은 그냥 바이바이만 한 게 아니다.
무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만의 흔적을 남기는 법.
그 흔적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생활의 일부가 된 그것을 깨달을 때면, 쓴웃음과 함께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도 마찬가지.
베끼지 않기 위해 잊었더라도, 그 작가가 심상에 남긴 흔적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잠자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어, 이거 그 작가 문장인데' 혹은 '이거 그 작품 플롯이잖아'하고 뒤늦게 깨달으면,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누가 봐도 알아볼 정도면, 아예 쪽팔리다.

그래도 지금은 다행히 주석을 다는 소설을 쓰는지라.
오마주임을 미주로 알린다.
'이 설정은 《OOOO》에서 땄습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글 쓰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작가란, 헤어진 연인과 비슷한 존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