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용감한 책 - 《꿈을 걷다(2009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by 신독

《꿈을 걷다(2009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노블레스 클럽 11)》 김정률, 문영, 민소영, 윤현승, 이재일, 전민희, 조진행, 좌백, 진산, 하지은, 한상운, 홍성화| 로크미디어| 2009.03.03 | 480p

1. 김정률, <이계의 구원자>
2. 문영, <구도>
3. 민소영, <꽃배마지>
4. 윤현승, <인카운터Have A Nice Encounter>
5. 이재일, <삼휘도三諱刀에 관한 열두 가지 이야기>
6. 전민희, <11월 밤의 이야기>
7. 조진행, <월아月兒 이야기>
8. 좌백, <느미에르의 새벽>
9. 진산, <두 왕자와 시인 이야기> <그릇과 시인 이야기>
10. 하지은, <앵무새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다>
11. 한상운, <거름 구덩이>
12. 홍성화, <마그니안>

한마디로 이 책을 평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용감한 책>.

작가 열두 명의 열세 작품이 수록된 이 단편집을 말할 때,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출판사다.
용, 감, 했, 다.
이미 다른 지면에 소개된 단편들을 엄선해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이런 단편집인데,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 이미 다른 지면에 소개되었던 글들은 무척 소수이다. 대부분의 단편이 기획 후에 쓰였으니. 이런 작업은 맨땅에 머리를 박아 이마가 박박 벗겨지도록 밭을 일구는 것과 같다.

작가들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베스트 컬렉션’이라기보다는 ‘베스트 작가 컬렉션’이라 봐야 옳다. 모두가 장르판에서 알아주는 작가들이다. 작가를 섭외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들었을 것이고, 이 작가들에게 원고 독촉을 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원고를 모으는 것 자체가 벽이었으리라. 물망에 올랐으나, 여러 이유로 누락된 작가들도 있다 알고 있으니, 그 고충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편집과 교정 또한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 구구절절한 기막힌 사연들이 숨어 있을 게다. 단편이 아니라 장편 시장만 존재한다고 봐야 하는 우리나라 장르판을 생각하면, 가히 백절불굴의 용기로 만들었을 책이다.

게다가…… 이 작가들 중 일부는 이번에 단편소설을 처음 써 보았을 것이다. 단편과 장편은 길이만 다른 것이 아니다. 호흡도 다르고, 구성도 다르다. 이야기를 압축하는 묘미를 체화하지 못한 작가는 이번에 정말 개고생들을 했을 것이다. 이들 또한 참으로 용감했다.

그러나 이 용감무쌍한 시도 덕에 잘 연마된 보석 같은 단편들이 책으로 탄생했다. 물론, 모두 보석이 된 것은 아니다. 원석의 수준에 머문 글도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원석의 미려함까지 망쳐 버린 글도 있다. 그러나 시도한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모두 용, 감, 했, 다.

이 컬렉션의 백미는 문영 님의 <구도>라 해야겠다.
놀라워라. 《무적기사단 3조》와 《숙세가》를 보며 그 역량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단편을 뽑아내실 줄은 몰랐다.
협객의 기원이라 할 자객 ‘형가’의 이야기를, 살짝 비켜난 시선으로 응시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제목인 ‘구도’는 狗屠로도, 求道로도 읽힐 수 있어 복합적인 심상까지 전달하는데, 오랜만에…… 다른 작가의 글을 읽고 좌절할 뻔했다.
역사소설이나 팩션으로 분류할 수도 있는 이 단편은, 무협소설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감상-가슴이 뜨거워지고 피가 끓는다-을 압축적이고도 깊이 있게 전달한다. 역사학을 전공하신 분이니, 이분께는 조선 배경의 걸출한 장편 팩션을 기대해도 좋겠다. 현학이 제거된, 역사를 제대로 알고 이야기를 맛깔나게 할 줄 아는 이의 팩션이라니. 아아, 정말 보고 싶어라.

평생 단편소설만을 쓴 보르헤스는 ‘단편으로도 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장편으로 써야 하나?’라고 말했다.
보르헤스의 말에서 드러나듯 장, 단편은 이야기 스케일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 길이의 문제이지 스케일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잘 쓴 단편은 때로 장편 못지않은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문영 님의 <구도>가 꼭 그랬다.
20쪽이 안 되는 이 짧은 단편을 읽고도 500쪽이 넘는 장편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꽉 찬 감상에 젖을 수 있었으니.

진산 님의 연작 단편, <두 왕자와 시인 이야기>와 <그릇과 시인 이야기>도 빼어나다. 단편소설을 많이 다루어 보신 진산 님은 이제 단편 안에서도 특유의 재기와 화려함을 유감없이 발휘하시더라.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 조련사가 미려하게 휘두르는 채찍질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글이라면 얼마든지 채찍에 몸을 맡기는 마조가 될 용의가 있다. 이 연작의 화자인 시인을 주인공으로 몇 편의 단편이 더 나와 《진산 판타지 단편집(내게만 노래하는 시인의 이야기)》이 탄생하면 좋겠다.

좌백 님의 SF단편, 《느미에르의 새벽》도 좋았다. 하드 SF처럼 글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느미에르’에 집중하셨더라. 연작 단편으로 쓰실 계획이 있으신 것 같던데, 나는 한 권이나 두 권 정도의 장편소설로 쓰시면 어떨까 싶었다. 이 단편의 말미에서 느미에르는 스스로 완성된 생명체로 의지의 각성을 선언하는데, 완결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세계관을 다룬 프롤로그의 느낌이 더 강했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더 많이 있고, 그 남은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달까? R-용병단의 아르를 주인공으로 세운, 느미에르의 폭주와 종말을 다룬 꽉 짜인 묵시록을 보고 싶어졌다. 뭐,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욕심이기는 하지만.

이재일 님의 <삼휘도三諱刀에 관한 열두 가지 이야기>는 마지막이 조금 아쉬웠다. 이 글은 《쟁선계》처럼 여러 화자를 등장시키면서도, 주인공 삼휘도에게 모든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각 이야기의 화자를 따라가다 보면 삼휘도의 행도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구성이다. 깔끔하고도 정제된 문장과 특유의 세밀한 시선으로 미스터리의 효과를 제대로 주셨지만, 마지막 이야기에서 한꺼번에 모든 전말을 밝힌 것이 조금 아쉬웠다. 원래 장편으로 구상하셨던 이야기를 줄인 탓이라 알고 있지만, 열한 번째 이야기에서 절정을 터뜨리시며 화자의 추리를 통해 복선의 대부분을 밝혀 주셨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삼휘도의 고백이 사건 전말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동기를 밝혀 공감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라, 쩝쩝.

이 다섯 편의 글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이번 컬렉션의 기획이 통과된 후, 새로 쓰인 글들로 알고 있다.
수준도 다양하고 장르도 다양하지만, 나는 ‘글은 글일 뿐이다’라는 말-고무림 비평단의 초대 단장이셨던 무우수 형님이 즐겨 하셨던 말씀-을 좋아한다.

물론, 각 장르에는 작가와 독자 모두가 공유하는 그 장르 특유의 ‘재미’가 따로 있다. 그 ‘재미’를 전달하지 못한 글은 잘 쓰인 글이라 할지라도 ‘재미없다’라고 독자는 말할 수 있다. 그 ‘재미’에 충실한 글은 글의 수준이 떨어지더라도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글은 글일 뿐이다.
특히나 단편소설처럼 자신의 실력을 알몸으로 공개하는 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컬렉션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수준에 관계없이 모두 용감했다.
자신의 단점이 압축적으로 공개될 무대임을 알면서도 올라갔으니.

이 ‘베스트 컬렉션’ 기획이 단발에 그치지 않기를 빈다.
출판사가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작가와 독자가 호응해 주지 않는다면, 계속 이어지기 힘든 용감한 기획이다.
<꿈을 걷다>가 ‘꿈을 걷어 버리는’ 마지막 시도가 아니라 ‘꿈속을 계속 거니는’ 전설이 되기를 희망한다.

덧글

  • 다라나 2009/05/16 14:19 #

    구도는 나랑 완전히 다른 감상이네. 무적기사단 3조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나에겐 이 작가가 장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글 잘 쓰는 작가인데.
  • 신독 2009/05/16 16:47 #

    길고 재미있는 토론이 가능하겠구려. +_+
  • 2009/05/16 17:2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5/16 17:32 #

    저런. 그거 안 좋은데요. 시야가 좁아지거든요. -_-a
  • 하지은 2009/05/16 23:50 #

    구도는 저도 정말 좋았어요.
    다리는 이제 안 아프답니다. 이것저것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ㅎㅎ 이틀 남았네요.
  • 신독 2009/05/17 00:04 #

    괜찮아졌다니 다행이구나. 여행 중에도 신경 끄지 말고 계속 풀어줘야 할 게다. 잘 다녀오렴. ^ ^
  • 새파란상상 2010/03/16 15:57 #

    좌백님은 교보 북로그에서 새 소설 연재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무사히 잘 끝났으면 좋겠어요.
    일단 어서 배너부터 달려야... 배너가 안 달려서 사람들이 못 찾을까 걱정이네요.
  • 신독 2010/04/05 08:09 #

    역사소설을 예전부터 쓰시겠다 했었는데 이번에 시작하셨더군요. 기쁜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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