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그도 웃음을 아는 사람이었다 -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1953-1960)》 by 신독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1953-1960)》 아서 C.클라크| 고호관 역| 황금가지| 2009.03.13 | 499p

아서 찰스 클라크(1917-2008).
나는 그를 《라마와의 랑데부(1973)》로 처음 만났다. 그것도 그의 영혼이 우주로 떠난 후에야.
193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이 SF소설계의 거장은 이른바 ‘하드 SF(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소설의 중심에 있는 과학 소설)’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소설에 대한 이런저런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그것이 결국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임은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드 SF는 조금 특이한 장르다.
여타의 소설에서 인간이 주主가 된다면, 하드 SF는 인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주主다.

인물, 사건, 배경 같은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떤 소설이건, 인간이 등장하면 반드시 그들이 활동하는 배경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하드 SF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나 배경이다. 인물들끼리 겪는 갈등 또한 사건이나 배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니.

대개의 소설 독자는 ‘사람 얘기’를 보고 싶어서 독서하기 때문에, 사람 대신 사건이나 배경이 지나치게 자세히 다뤄지면 딱딱하게Hard 느끼고, 지루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서브 장르는 이름까지 ‘하드Hard'인 것이다. 소설에서 다루는 과학 자체에 흥미가 없다면, 정말 딱딱하고 재미없는 장르가 바로 이 하드 SF랄까.

스탠리 큐브릭과 아서 클라크가 함께 만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1968)》를 보신 분이라면 이해하실 것이다. 그들이 만든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꼭 그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맡더라도 이야기에 별로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아닌 탓이다.

그래서 이 단편집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낄낄거리며 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973년의 그 심각하신 아서 클라크가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에는 이렇게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다니.
자지러지는 웃음을 주지는 않지만, 은근한 웃음과 친근한 유머가 단편들의 곳곳에 넘쳐 난다.
아니, 어쩌다 웃음을 잃으신 것이옵니까?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쓴 단편을 모은 이 책에는 모두 3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1. 다른 호랑이 (1953)
2. 홍보 활동 (1953)
3. 무기 경쟁 (1954)
4. 해저 목장 (1954)
5. 더 이상 아침은 없다 (1954)
6. 대박의 꿈 (1956)
7. 특허 심사 (1954)
8. 망명자 (1955)
10. 동방의 별 (1955)
11. 반중력 (1956)
12. 달을 향한 모험 (1956)
13. 평화주의자 (1956)
14. 육식 식물 (1956)
15. 주동자 (1957)
16. 어민트루드 인치 내던지기 (1957)
17. 궁극의 멜로디 (1957)
18. 지구의 다음 세입자 (1957)
19. 냉전 (1957)
20. 잠자는 숲속의 미녀 (1957)
21. 보안 점검 (1957)
22. 바다를 캐는 사람 (1957)
23. 임계질량 (1957)
24. 하늘의 저편 (1957)
25. 빛이 있으라 (1957)
26. 태양 밖으로 (1958)
27. 우주의 카사노바 (1958)
28. 머나먼 지구의 노래 (1958)
29. 가벼운 일사병 (1958)
30. 거기 누구냐? (1958)
31. 요람을 벗어나, 우주로 (1959)
32. 나는 바빌론을 기억한다 (1960)
33. 시간이 말썽 (1960)
34. 혜성 속으로 (1960)

<하늘의 저편 (1957)> 전까지 쓴 대부분의 단편은 과학자들과 SF소설 팬들이 은밀히 모이는 주점인 ‘하얀 사슴’에서, 구라 잘 치고 뻔뻔한 강심장의 소유자인 해리 퍼비스라는 과학자가 등장해 이야기를 이끈다.

<주동자 (1957)>에서는 찰스 윌리스라는 클라크 자신의 미들 네임을 딴 인물까지 슬쩍 등장시키는 장난을 치셨더라.

나는 아서 클라크가 인물을 그리는 재주가 없거나, 그릴 마음이 아예 없는 거라 생각했는데……, 장편 소설을 쓰는 그의 관심은 인물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해졌다. 뻥 잘 치는, 아니 뻥을 과학적으로 치는 해리 퍼비스는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달을 향한 모험 (1956)>은 아서 클라크의 하드 SF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반길 단편이다. 이곳에도 은근한 유머가 깔려 있어 즐거웠지만, 달에 착륙한 최초의 세 나라 우주인들-현실에서는 소련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 홀로 갔지만, 소설에서는 러시아와 미국, 영국이 함께 갔다-이 겪는 자잘한 사건들이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이 단편집의 최고는 <하늘의 저편 (1957)>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우주 정거장에 체류하는 우주인의 일상과 업무, 사랑까지 다룬 이 소설을 보고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우주비행사의 꿈을 꾸었을까. 그 정도로 이 소설은 사실적이다. (1969년 달에 첫 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이 아서 클라크에게 경의를 표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머나먼 지구의 노래 (1958)>는 현재로서는 과학 소설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해야겠다. 이 단편은 2626년 항성 식민지 건설을 했다는 가정 아래 쓰였는데……, 현재로서는 항성 간 우주여행이 가능할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우주선의 속도가 광속에 가깝거나 광속의 절반 정도는 나와야 할 텐데, 내가 알기로는 종래의 연료 탱크나 화학 로켓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질량은 무한대에 가까워지는데…… 몇 십 톤이 넘을 우주선의 질량을 버티며 그 정도 속도를 낼 만한 에너지원은 아직까지 이론적 접근만 가능한 단계다. 하긴 뭐, 600년 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ㅎ

거장의 향기를 직접 맡을 수 있어 단편집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그가 심각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웃을 줄 아는 분이었다는 것을 알아 더 기쁘고.

아서 클라크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절정기의 단편들은 이 책의 후속인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1960-1999)》에 수록되어 있다.
황금가지에서 정말 좋은 기획을 하였다.
단편 전집이라니.
하드 SF의 팬, 아서 클라크의 팬이라 자처한다면 부디 놓치지 마시길.
SF소설은 단편을 팔 수 있는 시장이 태생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뛰어난 단편이 정말 많다.
게다가 무려 아서 클라크의 단편이다.
클라크답게 스케일이 큰 단편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의 아기자기한 면모를 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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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2009/05/09 00:31 #

    -원제: The Collected Stories of Arthur C. Clarke -저자: 아서 찰스 클라크 -역자: 고호관 -출판사: 황금가지 한 작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빠짐없이 살펴보는 것은 매우 즐겁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문학 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수련을 거친 끝에 정제되고 가공된 형태로써 독자들 앞에 선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만큼 같은 작가라도 시기와 상황에 따......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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