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절반의 대만족, 절반의 왕짜증 - 《하드 SF 르네상스 2, 그렉 이건 외》 by 신독

《하드 SF 르네상스 2 (The Hard SF Renaissance 2)》그렉 이건 외| 김상훈, 이수현 역| 행복한책읽기| 2008.11.10(2002) | 294p

이 책의 편집자인 데이비드 하트웰과 캐스린 크레이머는 1990년대에 일어난 하드 SF의 새로운 성과를 이 선집의 제목인 ‘하드 SF 르네상스’라 불렀다. (2권 말미에 이에 대한 흥미로운 비평이 실려 있다)

어쩌다 보니 2권을 먼저 보게 되었는데, 내게 SF의 바다를 알려 준 분이 초강추한 단편집이었기 때문에 기대가 굉장했다.
결론은 절반의 만족.
대단히 안타깝게도…… 딱 절반의 분량만 대만족했고, 나머지 절반은 거의 ‘분노’에 가까운 짜증을 내다 다 읽지도 못했다.

2권에는 총 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1. 유전자 전쟁 - 폴 맥콜리
2. 내가 행복한 이유 - 그렉 이건
3. 붉어지기만 하는 빛 - 데이비드 브린
4. 공룡처럼 생각하라 - 제임스 패트릭 켈리
5. 그리핀의 알 - 마이클 스완윅
6. 다른 종류의 어둠 - 데이비드 랭포드

이 중 3까지는 김상훈씨가 번역했다. 이분은 테드 창의 단편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번역한 그 사람이다. 하드 SF는 장르의 속성상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기 마련인데, 김상훈씨의 번역은 깔끔한 편이었다. 전문 용어의 쉬운 전달은 물론, 번역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이야기에만 빠져들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이 세 단편 중 백미는 역시 <내가 행복한 이유 - 그렉 이건>일 듯.
역시 김상훈씨가 번역한 《쿼런틴, 그렉 이건》을 반드시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자역학과 나노테크, 신경과학 등의 복합적 베이스를 깔고 전개된 역작이다.
그렉 이건은 김상훈씨가 직접 테드 창과 인터뷰했을 때도 언급된 작가였는데, 과연 이 글은 테드 창의 중편 <이해>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꽤 있더라.

김상훈씨가 번역한 단편들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과연 초강추받을 만한 책이다 고개 끄덕였지만, <공룡처럼 생각하라>를 보며 조금씩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리핀의 알>을 보다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모두 이수현씨가 번역한 단편들인데, 얼마 전 읽은 《노인의 전쟁》을 번역한 그 사람이다.
그때도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인용하다 고개를 갸웃거렸긴 했다. 이야기에 빠져 발견하지 못했던 미묘한 '병맛'을 발견했기에.

약력을 보니 이미 스무 편이 넘는 책을 번역했단다. 검색을 해 보니 SF, 판타지, 미스터리까지 번역하고 있더라. 이른바 장르소설 전문번역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때까지 북하우스나 황금가지 같은 우량 출판사와 작업해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이 《하드 SF 르네상스》는 원래 세 권으로 기획되었다가 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줄여 상당량의 단편을 누락시킨 채 번역했다 알고 있다. 경영이 어려웠던지 다른 내부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서인지 이 2권의 교정 상태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기본적인 띄어쓰기도 잡아내지 못한 채 출판했으니. (‘첫 번째’, ‘두 번째’ 같은 기본적인 띄어쓰기도 ‘첫번째’, ‘두번째’로 그냥 냈다)

그 결과, 번역가 이수현씨의 우리말 실력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전문 번역가로 누구나 첫 손가락 꼽는 이윤기 선생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번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우리말 실력이다. 사전 한번 들추지 않고 줄줄 우리말로 옮길 외국어 실력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그렇게 옮긴 문장이 번역기에 돌린 것처럼 ‘병맛’이라면.

<공룡처럼 생각하라>는 그래도 읽을 수 있었다. 분량이 짧다보니 나름대로 집중력을 발휘했나 보더라.
하지만, 마이클 스완윅의 <그리핀의 알>을 보며 뚜껑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마이클 스완윅은 《오늘의 SF 걸작선》을 보며 이미 <슬로 라이프>로 안면을 익힌 작가다. 클라크 풍의 장중한 하드 SF를 구사하는 뛰어난 이 작가의 글을 나는 안타깝게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읽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추측’해서 ‘이해’해야 하다니. 다른 서브 장르도 아니고 ‘하드 SF'를 그런 식으로 어떻게 본단 말인가?

대사를 구어체로 번역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치자. (‘나는’은 모두 ‘난’, ‘너는’은 모두 ‘넌’, ‘것은’은 모두 ‘건’, ‘것입니다’는 모두 ‘겁니다’식으로 쓰더라. 줄여서 말하는 사람만 만나며 살았나?)
하지만, 중장비를 운전하는 거친 노동자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학생 아이들처럼 말하는 것에는 정말 깼다.
(우리말에서 대화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단어보다는 어미인데, 남녀나 초중장년의 구분 없이 ‘-요’, ‘꿈꾸시네’ 같은 어투를 구사하신다. 돌겠더라. 등장인물도 많은 중편 소설인데, 누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한참 읽어야 파악이 된다. 어쩌라고?)

더구나 <그리핀의 알>은 등장인물 간 대화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대화들이 몸이 꼬일 정도로 어색하기 짝이 없으니... 결국에는 읽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orz
<다른 종류의 어둠>도 마찬가지.

백 보 양보해서 문장의 ‘취향’ 차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형편없는, 혹은 조악한 문장이다.
이백 보 양보해서 구어에 대한 세대 차이라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미래의 달 기지에서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본 애니의 캐릭터들처럼 말한다 이해해야 하나? 최불암씨가 심각한 드라마에 중량감 넘치는 인물로 나와 '뭥미? 난 너 싫거든?'식으로 말하는 격이다.
삼백 보 양보해서 예전의 중역 시절에는 그래도 감사해하며 이 정도 글들도 읽었다 위안하며 계속 읽고 싶었지만,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다. 무려 2009년이란 말이다!

앞의 세 편을 번역한 김상훈씨 때문에 더 비교가 되더라.
어슐러 르귄의 책을 많이도 번역했던데, 출판사의 교정이 훌륭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르귄의 책까지 읽다 던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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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라나 2009/04/21 18:54 # 답글

    내 감상에 사실 빠진 부분이 있는데, 하트웰에게 고맙고, 행복한책읽기에 고맙고, 김상훈에게 고맙고, 이수현과 교정자에게는 안 고맙다고 썼는데, 노인의 전쟁을 아직 못 읽는 바람에 안 고마운 부분을 뺐어. 너 감상 보니 역자가 같더라. 그래서 예약 걸려 있으니 읽은 후에 판단하려고.

    쿼런틴은 집에 있으니 빌려줄 수 있는데, 시간 많이 나고 심심할 때 보는 게 나을거야. 뒤로 가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넘사벽이란 단어가 딱 맞는 뒷부분이 쿼런틴이야.
  • 신독 2009/04/21 19:32 #

    <노인의 전쟁>은 읽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어.
    대화 번역은 이 책도 어색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이끄는 수단이 대화가 아니거든. 몰입을 깰 정도는 아니야.
    <그리핀의 알>은 몰입할 시간도 안 준 게 문제였지. =.=

    <쿼런틴>도 번역에 문제가 있나? 형이 넘사벽이라 말할 정도면,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게 낫겠군. 에혀.
  • 다라나 2009/04/21 20:48 #

    쿼런틴 앞부분은 안 그래. 뒷부분은 번역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원글 자체가 좀 어려운 것 같아. 내 생각은 원글이 어려워서 번역자가 이해를 못 한 것 같아.

    갑자기 든 생각인데, 좁은 SF 바닥에 같은 이름의 번역자가 있길래 동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동명이인 아닐까?
  • 신독 2009/04/21 21:34 #

    <쿼런틴>은 양자역학이 제재라고 알고 있어. 하드 SF답게 스쳐 지나가는 설정 정도가 아니라 정면으로 다뤘다고 들었으니, 번역이 약간만 틀어져도 뜻은 안드로메다로 향하기 십상이지. 일단, 보고 나서 판단해야겠다. 양자역학이 복잡해 보이는 학문이기는 하지만,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같은 책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더라구. 나 같은 인문학 전공자가 이해할 정도면, 소설로 썼을 때 당연히 이해가 가야 정상이지.

    '동명이인'은 이수현씨를 말하는 거지?
    동일인이 맞아. 약력이 같거든.
    <노인의 전쟁>도 대화 번역이 미묘하게 맛이 이상해. 75세 노인이 '그랬니', '저랬어'라고 어미를 쓰고, 지시 대명사나 인칭 대명사의 번역도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많지. He를 '그 남자'로 번역하는 버릇이라든가, '-겁니다'처럼 구어형의 줄임말을 애용한다든가, '난', '넌' 등으로 인칭 대명사를 꼭 줄임말로 쓰는 버릇이 같아. 동일인의 번역이 맞지.
    그래도 <노인의 전쟁>은 나름 교정에 애쓴 책이니, 고개를 갸웃하기는 할지언정 읽는 데 지장을 받지는 않을 거야.

    뭐, 딱히 교정의 유무를 떠나 동일인의 번역이라도 수준이 동일하지는 않은가 보더라고.
    잘 모르거나, 귀찮거나, 번역료 등의 문제가 있을 때 대충대충 번역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니까. 일종의 태업이랄까?
    독자야 그런 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고, 알아 줄 이유도 없지. 결과물인 책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니까.
    어떤 번역자를 만나냐는 사실 운인데... 마이클 스완윅이 재수가 없었던 거랄까. -_-
  • 만인의유동닉지나가다 2009/04/22 10:24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도서밸리 보다가 왔습니다. 일단 비로그인이라 죄송합니다.
    이수현씨는 남성적인 어투를 잘 구사하지 못해서 그런 쪽 약점이 있다고 지적되는 번역가입니다...만 유행어를 남발하거나 심각한 비문을 쓰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걸로 압니다. 예로 드신 최불암이나 애니메이션투라는 건 좀 이해가 안되네요. (언급하신 노인의 전쟁, 하드SF 르네상스, 쿼런틴, 당신 인생의 이야기 등은 전부 봤습니다.) 르귄 작품 번역을 좀 맡았는데 이쪽은 큰 위화감이 없습니다.

    김상훈씨는 김상훈투라고 할만한 게 있어서 보면 역자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건 김상훈 번역이다 하고 알 정도예요. 가끔 작가색이 묻히는 느낌을 줘서 그리 좋아히진 않습니다. 젤라즈니 작품은 거의 이 분이 번역하신 걸로 압니다.

    작가랑 번역가의 궁합이랄까, 어울리는 번역가가 있고 안어울리는 번역가가 있다...고 보는게 맞지 않나 합니다. 장르소설 시장 자체가 작다보니 번역가 풀도 그리 크지 않아서 그렇겠죠.


  • 신독 2009/04/22 13:10 #

    <노인의 전쟁>은 저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번역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지요. 원작 자체의 이야기도 뛰어나고, 번역 또한 독서에 방해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하드 SF르네상스 2>의 <그리핀의 알>은 아예 읽지를 못했습니다. 꾹 참고 절반 정도 읽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죠.

    이 글은 제목에도 붙였듯이 [감상]입니다.
    문장에 대한 단정도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저 개인의 평가지요.
    [비평]을 지향했다면 길게 인용을 하거나 안 읽혀도 꼼꼼히 읽고 포스팅했겠지만, 이 글은 [감상]입니다.
    안 읽히니 못 읽었다 썼고, 등장인물 간 대화가 일본 애니메이션 번역투라 느꼈기에 그렇다 말했을 뿐입니다.

    다르게 보시는 분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그건 그분의 감상이니 제가 무어라 할 이유가 없지요.
  • 돌북 2009/04/22 17:02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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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독 2009/04/22 19:13 #

    이런 사이트도 있었군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 2009/04/23 03:01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4/23 09:08 #

    오, 형. 올만이야.
    갈쳐 준 거 잘 써먹을게. 참말 고마워. ^ ^

    * 근데... 제목은 어째 별로네. -_-a 설정의 맛을 제대로 살린 제목이 아닌 듯. (게다가... 노래 가사가 넘 생각난다구. 양희은씨 노래자너... -_-) 차라리 <킬링 무문관>은 어때? 컨셉에는 이게 더 맞고, 어감도 괜찮게 느껴지는데. 함 생각해 봐.
  • 눈공 2009/04/23 15:57 # 삭제

    으응? 양희은 노래? 깜딱 놀라서 검색해 보니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있더만....
    난 네가 노래가사 얘길 해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만 떠올렸더니....
    오늘따라 왜 이리 늙은 기분이 연짱으로 떠오르는지 모르겠군....최백호라니...

    암튼 노래도 좀 듣고 그래야 팍팍한 삶이 안될텐데....
    그래서 요즘 소시 노래 즐겨 들어....Gee Gee Gee......
    티파니만 보믄 회춘하는 기분이 들걸랑....그래도 완소 소희만큼은 아니지만....

    에휴....내가 지금 뭔 짓이냐....ㅠ.,ㅠ;
  • 신독 2009/04/24 11:28 #

    ㅎㅎ
    별 거 아닌 걸 그쪽으로 몰아가는 건 아니고?
  • 2009/04/23 07:58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4/23 09:10 #

    본래... 민방위 끝나면, "내 청춘 이제 끝났구나" 한다더라. ㅎㅎ
    기준을 왜 그런 거로 잡아. 좀 더 실현 불가능한 기준으로 잡는 게 합리적이라구.
  • 해리엣 2009/04/24 18:07 # 삭제 답글

    김상훈(강수백)씨는 젤라즈니 번역의 인상이 워낙 강렬한 탓인지 다 비슷하다고 하는 분들이 가끔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작가의 문장 스타일이나 원문에 상당히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타입의 번역자라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테드 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의 서정적이고 깊이 있는 문장은 <신들의 사회>의 마초 주인공들의 대사와는 전혀 딴판이죠. 본인도 알라딘 인터뷰에서 매끄러운 번역보다는 뉘앙스를 살리는 쪽을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고요.

    http://www.aladdin.co.kr/artist/wmeet.aspx?pn=20030506_kimsanghoon
    (알라딘 인터뷰 링크입니다. 사진은 엑박이 뜨네요.)
  • 신독 2009/04/24 21:28 #

    링크에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대한 확실한 주관이 인상적이군요.
  • 지나가다 2009/06/16 00:47 # 삭제 답글

    그리판의 알을 꾹참고 끝까지 읽은 뒤 웹을 검색하다 이 포스트를 발견했습니다.
    나만 저렇게 느낀게 아니구나 싶어 약간 위안을 얻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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