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 대한 결론 by 신독

빤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던 경험을 한 결과... 분명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최근 중무 번역 원고의 윤문 작업을 두 종 해 보았다.
처음 한 것은 번역 원고가 워낙 좋았다.
두 번째 한 것은 번역 원고 상태가 정말 후졌다 안 좋았다.
책 읽기와 글쓰기도 멈춘 채 한동안 올인한 후에야 오늘 새벽, 겨우 마감 날짜를 지켰다.

원본을 본 바로는, 번역 전 두 원본의 문장 수준 차이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두 번째 원고는 중국도 만화의 영향이 있는지 의성어(웃음소리, 쾅쾅 등)나 구어 대사를 자주 쓰기는 했지만, 그 외의 묘사나 구성은 꽤나 뛰어난 글이었다. 오히려 대중성으로 따지면 첫 번째 원고보다 높은 점수를 줄 글이니.

하지만, 이미 출판된 책의 수준은 같은 윤문자인 내 손을 거쳤음에도 전혀 다르다.
전자가 훨씬 뛰어나다.
윤문하는 시간은 후자에 훨씬 더 들였음에도.
번역된 책의 경우, 처음 번역된 원고의 수준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두 번째 글의 경우 어떤 문장들은 직접 원본을 보며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지만, 모든 문장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면, 시간은 지금의 두 배는 더 들었을 테니. 그렇게 했다면 출판사가 요구하는 날짜에 절대 맞출 수가 없었다.
윤문한 시간이나 공력은 서너 배가 더 들었음에도 원래 비슷한 수준이었던 두 중국무협의 문장은 이제... 누가 봐도 수준 차이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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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는, 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맞춤법에 신경을 안 쓴다는 작가의 말도 나름 타당하다 고개 끄덕였다. 전혀 아니다 싶은 글을 쓰는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이 자식 까고 있네' 하고 말았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바닥에서 나름 잘 쓴다 평가받는 이들이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인정해 주었던 거랄까. (요새는 뭐도 뛰니 뭐도 뛴다고 처음 글을 쓰는 습작가까지 이러며 다녀 한심한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실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문장에 신경을 쓰며 글을 쓰는 작가는 이것들에 대해 나름의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글의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퇴고를 하면 이것은 더 늦어진다.
퇴고를 하다 수정할 점을 발견해 수정 작업에라도 들어가면 더욱 늦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 ㅣ 완성도>의 측면에서만 이 문제를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완성도 높은 글이 최고다는 말은 상업성을 중시하는 장르판에서는 공허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출간 속도가 빠른 작가와(물론, 독자가 책을 접지 않을 만한 최소한의 '재미'가 보장되는 글이어야 한다), 완성도와 흥미도가 높더라도 출간 속도가 극악인 작가는 판매량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작품성은 작품 평가의 중요한 척도이기는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그것이 기본이 아니다.
기본은 어디까지나 판매량이다.
판매량이 어느 정도 보장되지 않는 작가는 일부 독자에게서 추앙은 받을지언정, 계속 글을 쓰기조차 어려운 곳이 이 바닥이므로.
애초에 예술을 하고픈 자가 있을 곳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극악의 오타 비문을 교정하며 윤문을 해 본 결과, 분명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 수준에 신경을 쓰냐 마냐는 작가에게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그 선택은 <완성도>를 일정 부분 희생하며 <속도>와 <이야기의 재미>에 집중한다는 수준이 아니더라.

흔히, 이 바닥의 독자는 <양산형>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해당 작가는 누구도 자신이 <양산형 작가>라 자인하고 다니지 않는다. 모든 독자가 <양산형 작가>라 생각하는 이도 자신을 <양산형 작가>라 부르면 모욕받은 듯 분노한다.

문피아에서 활동하며 글만 쓰면 모두 <작가>라 불러왔다.
내 안에 writer와 author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운영진이기도 하니 글을 연재하는 이들은 모두 작가라 부르며 대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기 힘들 것 같다.

문장에 신경 쓰지 않는 작가는 인기가 있더라도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작가도 몇 개의 층위로 나뉘리라.

첫째. 좋은 출판사, 훌륭한 편집자를 만나면 깨끗한 구조의 문장으로 출판될 수 있는 정도의 글은 쓰는 작가.
둘째. 최고의 편집자와 작업하고 있더라도 원본의 문장이 극악이라 평범한 문장으로 출판되는 작가.
(직접 해 보니 알겠더라. 원본의 오타 비문도가 극심하면, 어떤 편집자라도 새로 쓰지 않는 이상 원래의 암담한 문장을 완전히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원본 문장의 잔상이 이미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은 후이기 때문에. 이 바닥에는 사실 편집자가 완전히 새로 쓴 글도 여럿 있다.)
셋째. 출판사 선택조차 잘못해 극악의 문장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노출되는 작가.

이 세 층위의 전제 조건은 <이야기가 재미있는 글을 쓰는> 작가다.
문장도 엉망이고 이야기도 재미없다면 다시는 출판 못해야 하는 것이 정론이다. 지금은 종수로 손실금을 만회해야 하는 출판사의 사정상 이런 글들까지 책으로 출판되는 현실이지만.

첫째 층위의 작가는 좋은 출판사, 훌륭한 편집자와 계속 작업을 하는 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가는 결국 출판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높은 인세를 제시하더라도 극악 교정을 하는 출판사와 만난다면 만천하에 자신의 알몸을 노출하게 될 테니.

둘째 층위의 작가는 이 시장이 존속되는 한, 계속 존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면,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단지, 이런 작가가 author를 자인하고 다니니 헛웃음을 흘릴 뿐이다. 물론 이해한다. 자기 문장의 수준조차 모르고 있을 테니, 생존의 기간을 작가의식이 생긴 기간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셋째 층위의 작가는 결국 독자에게 외면받는다. 새로운 작가진이 계속 유입되고 빠져나가는 이 바닥의 속성상, 이런 작가는 쉽게 잊힌다. 이야기마저 반복된 구조를 사용한다면 도태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 이것은 현재의 인기도와는 무관한 진리이다. 스토리텔러로서 계속 새로운 이야기 구조를 창출할 능력이 없는 이상(이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고스트 작가를 고용하지 않는 이상, 한 작가의 글은 여러 변화를 시도하더라도 그 알맹이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그가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한 가지이다), 자신의 수준을 독자에게 너무 빤히 읽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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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는 신인들이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하면, 언제나 '선택'이라 말해 왔다.
완성도냐 속도냐.
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려 줘야 할 것 같다.
양산형 스토리텔러와 작가다.

먹고 살 일이 막연해 생계를 위해 뛰어든다면, 생존 수단을 찾을 몇 년 동안은 이야기를 생산할 능력만 있으면 버틸 수 있다.
이런 이는 문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의 재미에만 집중하는 것이 생존 전략으로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글을 쓰고 싶고 한 사람의 작가로서 제대로 존중받고 싶다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공부, 문장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 옵션이다.
그렇지 않으면 잘해야 출판사에 종속되거나 출판사와 편집자 선택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작가는 판매량이 대단하더라도 결국 반쪽짜리 작가다.

장르판이 완전히 망하고 읽을 글이 전혀 없을 때, 혹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낡아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글을 요구할 때라면, 양산형 스토리텔러라도 레전드급의 판매량을 자랑할 수 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이 정도 급에 오르면 영원히 그 책만 연결작으로 내면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천시의 복을 타고난 것이라 누구나 그리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르판에서 계속 연명하고 싶다면, 이 바닥에서 진정 작가로 불리고 싶다면, 문장 수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다. 쉽게 잊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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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데뷔하던 무렵, 기록 형님은 내게 '작가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해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내심 '꼭 그래야만 하나?' 생각했으니.

하지만 이제는 알 듯하다.
제대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글만 봐도 그 사람이 문장을 위해 어떤 수련을 했는지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보면 아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한 사람의 작가로 부끄럽지 않고 싶다면, 문장 수련부터 하라 말해 주어야 할 듯하다. 문장과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둘 다 기본이 되어야지 어느 한 가지를 우위에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문장 대신 이야기에만 집중하라는 말은 '얼마 안 가 죽어라'고 저주하는 것과 진배 없다.
그 저주가 덕담처럼 행해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덧글

  • 2009/04/01 13:2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4/01 14:25 #

    웬만해서는... 이런 말을 잘 안 합니다만... 긴 댓글과 그간의 작은 인연도 있기에 말씀드린다면.
    비밀글 님 같은 경우는... 문장에 대한 공부보다는 스토리텔링에 더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맞다 봅니다. 이미 문장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셨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오타를 내거나, 말하고픈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문장이 아니니까요.

    장르판에서는,
    - 문장은 형편없으나 스토리텔링이 좋아 이야기가 재미있는 글
    - 문장은 좋지만 이야기가 재미없는 글
    중, 전자가 출판될 확률이 더 높습니다.
    계속 출판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전자가 더 높지요.
    문장은 떨어져도 스토리텔링이 뛰어나면 장르 독자는 인정을 하니까요.

    설정을 짜는 재미는 글 쓰는 사람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니, 창조주의 기쁨까지 느낄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에 착목해 이야기의 재미가 떨어진다면, 장르로서의 가치는 훼손되었다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진행하시던 글을 접고,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시는 것이 맞다 보여지네요.
    좀더 독자의 흥미를 끌고, 제시한 기대감을 계속 이어가며 확장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익힐 때라고 봅니다.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이전에 같은 고민을 했던 이들의 작법도 보아야겠지요.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베스트셀러쓰는법/딘 쿤츠>,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로버트 맥기> 두 권의 책을 권합니다. 정제된 사고를 즐기시니 두 권 다 독서에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작법이나 글쓰기 이론에 정답이란 사실 없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글쓰기를 스스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즐겁지만... 길고도 험한 길입니다.
  • 다라나 2009/04/01 15:50 #

    지당하고 시원한 말씀.

    근데 권경목 말고 문장은 엉망인데 이야기는 재미있다고 할 만한 사람이 있나? ㅡ.ㅡ 작가들 기준이 너무 낮어. 어리석은 독자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게 핑계가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네.
  • 신독 2009/04/01 16:31 #

    형... 내 집이기는 하지만... 대놓고 실명을 거론하면 어케 해. ㅡ..ㅡ
  • 아자자 2009/04/01 16:51 # 삭제

    다 좋은데 너 장가는 안가냐?
  • 신독 2009/04/01 17:21 #

    ㅡ..ㅡ
  • 안신 2009/04/01 20:11 #

    생각할 점이 많네요.
    좋은 이야기 보고 갑니다.
  • 안신 2009/04/01 20:13 #

    근데, 저 블로그 소개, 저거 참 재미있네요.
    떡실신을 보고 한동안 계속 "떡실신~! 떡실신~!" 했었습니다만, 이것도 참 좋은;; >_<
  • 신독 2009/04/01 22:27 #

    토끼 움짤 말하는 거이지?
    사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움짤은 저게 아냐. 저건, 좀더 희망차고 힘을 주는 움짤이라 걸어놓은 거지.
    누나를 위해 하루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걸어놓을게.
    나는 이런 게 좋더라구. ㅋ
  • 안신 2009/04/02 13:18 #

    -ㅁ-;;; 너무 과격해요;;;
    독이님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의외로 호러스러운;; ==__==;;;
  • 신독 2009/04/02 18:38 #

    누나도 피 좔좔 흐르는 법의학책 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구. -_-
  • 2009/04/01 21:2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4/01 22:41 #

    동감이야. 첫 문장부터 다른 이가 분명 있지. 이런 사람 보면 넘 부럽다구. 흙. ㅠ.ㅠ
    세상을 보는 눈이 어딘가 다르다는 거거든. 그야말로 '작가의 눈'을 가진 거이지.

    네 경우는 사실 <소설>에 대해 해 줄 말은 거의 없어. 이미 자신의 문장, 자신의 글을 거의 세운 편이라서. (네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더구나 나는 이런 말에 디게디게 인색한 편이니. ㅎㅎ)
    하지만, <장르성>에 대해서라면 조금은 해 줄 말이 있지.
    어째서 예술이 아니라 하면서도 문장을 강조할 수 있는지, 문장을 강조하면서도 '지금 예술 하냐?'고 비판할 수 있는지.
    "대충 쓸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에 너는 속으로 절대 동의하지 못했겠지만,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결국 내가 나보다 앞선 고민했던 이들에게 다 배운 것들이고, 나 스스로 고민하며 조금씩 결론내린 것들이라, 너만의 결론은 또 다르겠지만 말이지.

    * 우야뜬, 장하구나. 역시 고독한 바람을 맞은 보람이 있나 보다. ㅎㅎ 내게도 그 기적을 보여 주렴.
  • 2009/04/02 00:2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4/02 01:36 #

    역시... "대충 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모르고 있구나. 그럴 거라 생각했지.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말,
    "태어나려면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기억나지?

    헤세는 실제 동양사상을 많이 연구하기도 했는데, 저 명언에 관련한 유명한 중국 고사가 있단다. 선불교의 공안으로도 쓰이지. <줄탁>이라고 해. '줄'은 병아리가 알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말하고, '탁'은 어미새가 막 태어나려는 제 새끼의 알껍질을 부리로 쪼아 도와주는 걸 가리켜. 이 공안은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데, 내가 이 공안을 꺼낸 이유는 이 말이 '스승의 가르침'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란다.

    진짜 스승은 1부터 10까지 모든 걸 알려 주지 않아. 그건 좋은 스승의 자세도 아니지.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1부터 9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다 마지막 10에 도달하려는 그 순간, 번개를 때려 주듯 <탁>의 가르침을 내려 주신단다. 그 순간, 제자는 깨닫는 것이지. (선불교의 깨달음은 당나라 때부터 이런 식으로 전승되었어. 지금도 우리나라 선승들은 이 방식을 고수하시지. <줄>의 고뇌가 없으면 그 어떤 대단한 <탁>도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달까.)

    그 "대충 쓸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은, 실은 내게 하셨던 말씀이야. 나는 이제 그 의미를 머릿속의 이해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손으로 풀 수도 있게 되었지. 처음 들었을 때에는 머릿속으로밖에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꽤나 지독한 완벽주의자인 편이라, 글 쓰는 속도는 물론, 대여섯 권이 훌쩍 넘는 장편을 쓰면서도 시놉과 트리트먼트 작업까지 해야 글을 쓸 수 있었어. 게다가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맞춤법 실력이 개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까지 공부해야 했지. ㅎ

    그때 그러시더군. "대충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아니... 그게 무슨 황당한 말씀이십니까 싶어, 꼬치꼬치 여쭤 보았지. 나는 납득을 못하면 행하지 않거든. 이러저러한 말씀을 한참이나 듣고서야 머릿속으로나마 이해하게 되더군.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말을 안 하셨을 거라 단서를 붙이시더라.
    그때 내 글의 문제점 중 하나가 너무 꽉 짜 놓은 밑그림을 그대로 밀고나가는 거였는데, 단권도 아닌 장편을 이런 식으로 쓰면 인물이 다 죽고 작가가 설계한 스토리를 위해 생명력도 없이 움직이는 인형이 되고 말아. 처음 글을 쓸 때부터 여러 사람들한테 지적받은 것이었지만 알면서도 고쳐지지가 않았던 단점이었지.
    그래서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야.
    "대충 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대충 씀으로써 꽉 짠 내 설계 속에서도 인물들과 사건의 자유도를 높이라 말씀하신 거였지. 내 경우는 대충 써도 저절로 내부의 논리와 조직이 갖추어 질 거라 하시더군. 워낙에 내 머리가 논리, 조직, 이런 데에 익숙하기 때문에 말이야.
    그 말씀을 체화하기까지는 또 두 질을 더 소모해야 했지만...(아... 참 더디기도 하지. ㅎ)

    이 말은 너에게 대입해도 사실 비슷하단다.
    네가 아니면 이런 식의 말은 안 할 거야.
    "대충 쓸 줄도 알아야 해."

    너는 한 꼭지 쓰고 되돌아 퇴고하고, 문장 되씹고, 그 장면보다 나을 거라 생각되는 장면이 떠오르면 다시 쓰고...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해 좋아질 글이 있는 반면, 그런 식으로 작업하면 나빠질 글도 있단다.
    똑같은 작가인 네가 쓴 글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왜... 같은 배에서 낳은 자식이라도 다 다르다는 말 있잖니? 뭐... 좀 이상한 비유이기는 하다만, 글이야 작가에게는 사실 자신이며 자식이니까)

    너는 좀더 네 글에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어.
    내가 처음 보았던 이번 글의 초고와 현재의 수정원고를 비교한다면, 둘의 수준이 많이 다르지 않아. 독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공감도가 더 높은 건 오히려 초고였어.
    물론, 몇 번의 수정을 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너에게는 수정이니 퇴고 없이 한 권을 다 써보기를 나는 권하고 싶다.
    말 그대로 "대충 쓰는" 기분으로.
    그렇게 다 쓰고 난 후에 처음부터 다시 보며 퇴고를 해 봐. 처음 잡았던 초심을 유지한 채 쭉 몰입해 쓴 글이라면, 퇴고나 수정을 거치지 않고 완성한 글이라 해도 너를 심하게 실망시키지는 않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아마 한 꼭지 쓰고 되돌아 퇴고할 때 느끼는, 딱 그만큼의 불만만 생길 거야. 내 예상으로는 그래.

    이런 말은 직접 보면서 해야 전달도 잘 되고... 시간도 덜 걸리는데. ㅎ
    답글치고는 너무 길잖아, 이거. ㅡ..ㅡ
    고로, 『어째서 예술이 아니라 하면서도 문장을 강조할 수 있는지, 문장을 강조하면서도 '지금 예술 하냐?'고 비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로 해 줄게. 글로 쓰면 또 한참 써야 할 게다. >,<



  • 2009/04/02 03:3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04/02 06:54 #

    응. 꼭 그래봤으면 싶구나.
    하지만 '마음먹기 나름'인 건 아니지.
    글쓰는 시스템에 변화를 주면 의외로 쉽게 가능해진단다.

    중간에 막혀 글이 안 나갈 때, 나는 이제 처음부터 돌아가 읽지는 않아. 전에 말한 그 사후 '트리트먼트' 작업을 시작한 후에는. 글의 흐름은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 흐름의 조율이나, 이후의 전개에 대한 고민은 그것만 보며 하는 게 나아. 그것으로도 충분하니까.

    게다가... 자신의 글이라도 자꾸 읽다 보면 점점 맛이 떨어져. 맛이 떨어지면 고치고 싶어지지. 본래의 그 새콤하던 맛을 다시 느끼고 싶으니. 그 맛이 없어진 건 읽고 또 읽었기 때문인데, 그때쯤이면 어딘가 잘못되었다 느껴지거든. 그래서 결국 다시 쓰게 돼.
    이건 지독한 악순환이야. 거의 절망의 진창을 헤매는 기분이 드니까. 안 겪어 본 사람은 절대 모르지. ㅎ

    고민은 시놉시스를 작성하는 시기에 '추웅분히' 해 두는 것이 제일 나아. 첫 장면이라든가, 인상적인 대사, 캐릭터 결정 등이 이 단계에서 대부분 이루어져야 하니까.
    그렇게 시놉시스를 잡고 구상한 글을 그 안에서 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너무너무 쓰고 싶어 미치겠다'는 기분이 들어. 그때 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럼, 단번에 '쭈우욱' 달릴 수 있단다. 자신의 내부에는 이미 그 글에 대한 열망이 넘쳐 흐르고 있을 때니까. 기계식 키보드라면 비내리는 소리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지. 타다다다다-.
  • 안신 2009/04/02 13:25 #

    비글님과의 대화도, 보고서 많이 생각하고 갑니다.
    참 좋은 말이네요.



    ps.
    근데, 요새 독이님이 점점 진지해져서 조금 슬퍼요;; ㅇ_ㅜ;;
    보고 눈과 머리가 즐겁기는 합니다만.....농담따먹기의 깃털처럼 가볍던 독이님은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거죠? -_ㅜ;;;
  • 신독 2009/04/02 18:41 #

    누나야 예전에 다 고민해 봤던 문제일 텐데, 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지만, 나야 원래 뻔뻔하니까. ㅎ

    * 다시 웃기 시작했으니, 언젠가는 '우헤헤헤~'할 날도 오겠지, 뭐. 지금은 억지로 가벼운 체하면 어색하거든. (그래도 가끔 '아저씨식 농담'은 한다구. -..-)
  • 아련 2009/04/06 17:07 #

    가슴이 뻥뚫리는 글이었습니다.
  • 신독 2009/04/07 08:52 #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슴에 구멍이 나면 곤란하죠. ㅎ)
  • 2009/10/30 18:07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신독 2009/10/31 13:02 #

    에... 뉘신지 모르겠으나 그날을 기다리도록 하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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