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Phantom lady》, 윌리엄 아이리시| 최운권 역| 해문출판사| 2003.07.30 (1942)| 327p * 주의 : 줄거리가 약간 언급되어 있습니다.
세계 미스터리 소설의 3대 걸작이라는 거창한 수식어 때문에, ‘보긴 봐야지’하면서도, 《Y의 비극》이나 《And then there were none》을 읽으며 번개에 맞은 듯한 전율까지 느낀 것은 아니라서(적어도 후대에까지 걸작이라 불린다면 세월을 뛰어넘어 그 정도 충격은 줘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본 것은 아니었다.
사실 위 두 작품에 대한 내 감상은 공정한 평가로는 볼 수 없다. 《Y의 비극》을 읽을 때는 추리물에 익숙하지 않은, 약간의 거리낌도 갖고 있는 내 취향이 크게 작용했고, 《And then there were none》은 별 재미를 못 느꼈긴 했지만, 어릴 때 분명히 보았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환상의 여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에 쓰였는데도 낡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세월의 장벽마저 훌쩍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으니, 이 작품은 진정 ‘걸작’이라 표현하여 하등 모자람이 없는 글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환상의 여인》이 정통적인 추리소설이라 보기 힘들다 하여, 3대 추리소설에 드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래서 3대 ‘미스터리’ 소설로 불리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이 작품, 《환상의 여인》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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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전 150일’부터 ‘사형 집행일 하루 뒤’까지 챕터가 나뉜 이 글은 복잡한 구성-시간의 교차 편집 같은-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순서대로 쓰여 의외로 플롯이 고전적인 글이다.
그런데도 단순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부부싸움을 하고 집에서 뛰쳐나가 홧김에 생판 모르는 여자와 술, 식사, 오페라 관람까지 하고 집에 돌아온 스코트 헨더슨.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버지스를 비롯한 세 명의 형사였다. 아내는 넥타이로 목이 졸려 살해되어 있었던 것.
살인 용의자로 몰린 헨더슨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여자’를 찾기 위해 형사 버지스와 함께 술집, 레스토랑, 극장까지 차례로 찾아가나 어떤 사람도 자신과 동행했던 그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와의 말다툼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데다, 마음속에 진정 사랑하는 여인(아내가 아니라.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캐롤 리치먼)을 품고 있던 헨더슨 또한 우연히 시간을 함께 보낸 그 ‘여자’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구도 찾을 수 없으니, 바로 ‘환상의 여인’.
헨더슨은 재판 결과 유죄를 선고 받고, 사형이 확정된다.
그러나 형사 버지스는 재판 내내, 그 말도 안 되는 알리바이-누구도 보지 못한 여인과 살해 시각 함께 있었다는-를 계속 주장한 헨더슨이 무죄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버지스는 헨더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이미 사형이 확정되었고, 형사인 버지스로서는 도울 수 있는 한계가 명백하기에- 사람을 청하자 제안하고, 헨더슨은 자신의 사형을 막아줄 수 있는 친구로 존 롬버드를 꼽는다. 과거에는 목숨도 나눌 수 있는 사이였지만, 소원해진 지금도 자신을 도와주러 먼 남미에서 뉴욕까지 올지는 의문이라며.
존 롬버드의 등장은 남자의 감성을 묘하게 자극하는 면이 있다. 과거에는 목숨도 맡길 수 있는 사이였으나,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 그런데도 롬버드는 친구를 위해 그 먼 남미에서 오고야 만 것이다.
그는 경찰과 변호사도 놓친 증거, 그리고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그 ‘환상의 여인’을 찾아 사형집행일 18일 전부터 필사의 조사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 글은 강력한 기대감을 독자에게 선사하며 첫 번째 챕터부터 치밀하게 계산된 복선들을 하나하나 벗겨낸다. 확실히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서스펜스의 요소가 강한 미스터리로 분류해야 할 글이다.
단서를 찾아냈다 싶으면, 이어진 끈이 사라지고, ‘환상의 여인’을 찾아낼 것만 같으면, 또다시 환상 속으로 사라지고야 만다.
기대감을 주고 그 기대감을 해소해 주면서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간극을 계속 만들어 낸다. 그 간극 때문에 긴박감은 점점 고조되고 사형집행일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이다.
마침내 사형집행일 당일은 오고야 말고, 멋진 반전과 결말이 이루어진 후에 독자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하는 챕터가 제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독자에게 모든 것을 알리지 않고 미스터리를 해결한 후, 해결의 전말을 기나긴 대사로 설명하는 형식은 《Y의 비극》이나 《And then there were none》과 동일했다. 역시 비슷한 시대의 글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굉장히 만족해하며 읽었다. 반전 또한 오랜만에 기가 막혀 탄성을 절로 질렀다.
이 글은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치밀한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어, 좀처럼 겪기 힘든 일급의 재미를 제공한다.
꽤 오랜만에 굉장히 끌리는,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작가를 만났다. 다른 작품들도 봐야 알겠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레이먼드 챈들러만큼이나 좋아질 것 같다.
1903년생인 윌리엄 아이리시(1968년 몰)는 ‘코넬 조지 호플리-울리치’가 본명으로 코넬 울리치와 조지 호플리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소설들은 모두 코넬 울리치로 나와 있는데 조지 호플리로 썼다는 《Night Has a Thousand Eyes, 1945》는 아마도 번역되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히도 윌리엄 아이리시와 코넬 울리치 필명으로는 다수의 책들이 번역된 모양이니, 차근차근 읽어 봐야겠다.
또 한 명,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




덧글
둔저 2009/03/06 14:14 # 답글
저는 이걸 처음에 드라마로 만났었습니다.한국드라마인데
어느 방송국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스릴러드라마? 추리드라마? 서스펜스 드라마? 그런 식의 이름으로...
5~6부작으로 이런저런 드라마들을 보여줬습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로 봤죠.
물론 결말은 못 봤고요.
나중에 보니 거기서 본 드라마 중 다른 것도 유명한 추리소설이더군요.
신독 2009/03/06 15:11 #
저는 못 본 드라마네요.요즘 보고 있는 예전의 미스터리 소설들은 거의 다 영화로도 제작된 것들인데, 이 소설도 그렇습니다.
아직은 읽을 게 잔뜩이라 별 생각 없지만, 영화도 함 찾아서 볼까 싶어요.
둔저 2009/03/06 16:05 # 답글
그때는 한국드라마여서 처음에 원작도 한국껀줄 알았습니다.
신독 2009/03/06 20:12 #
못 본 게 다행이었네요. 번안 드라마를 봤으면, 글의 재미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 테니까요. ㅎ
아리사 2009/03/08 15:38 # 삭제 답글
환상의 여인 .... 넘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 환상의 여인에 대한 정체 확인에 신비로움이 조금 사라져서 뭔가 아쉬움이 있었던 ... 물론 추리소설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서도 . ㅡㅡ;
신독 2009/03/08 17:30 #
아,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저는 환상의 여인보다는 캐롤 리치먼에게 더 호감을 느껴서인지 그다지 아쉽지 않았습니다만. ㅎ
* 그나저나 새로 만든 블로그는 어디에 숨겨두신 겁니까? +_+
물망아 2009/03/10 13:52 # 삭제 답글
걸작임은 인정하지만,읽고 기분이 참...
안 읽은 것으로 하고 싶었어요.
어린 나이에 읽기를 권하고 싶은 글은 절대로 아니지요.
신독 2009/03/10 15:40 #
저런. 이 책도 어릴 때 보신 모양이시군요. -_-a
2009/03/12 08:0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신독 2009/03/12 11:18 #
자주 놀러 와도 좋다고 하셨으니, 자주 놀러 가겠나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_ _)
사진이긴 했지만, 건강하신 모습 뵈어 기뻤습니다.
2009/03/12 16:2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신독 2009/03/12 16:37 #
그 정도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출판사니 안심해도 돼. ㅎ출판사 입장에서도 작가가 쓰는 재미 느끼며 쓴 글을 출판하는 게 훨씬 득이지.
억지로 쓴 글보다 재미있을 건 빤한 사실이니까.
사정 얘기 잘하고(너무 오래 텀이 생겨 글이 안 나가 대신 잘 써지는 이 글 보낸다, 정도면 이해할 거야), 재미있게 쓰시길.
나도 기대할게. ^-^
안신 2009/03/12 16:45 #
감사~ 감사~ 독이님밖에 없삼;;; ㅠ_ㅠ;;;
신독 2009/03/12 19:51 #
아니... 아저씨가 버젓이 계신데 그런 위험한 발언을. ㅎㅎ(전에 전화 걸었을 때, 나도 당황했지만, 아저씨도 좀 당황하셨을 듯. ㅋㅋ 담에 또 통화하게 되면 ↑이 말 전해 드려야겠다.)
안신 2009/03/12 19:58 #
ㅍㅎㅎㅎㅎ 가장 당황한 건 나였지;; -_-;;;전화만 받으면 버버버벅거려서 아주 죽겠삼;; ㅠ_ㅠ;;
그후로 며칠동안은 틈만나면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_==;;;
2009/07/21 23:13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