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불한당들의 세계사》, 《알렙》 - by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by 신독

[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ㅣ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역| 민음사| 1999.03.01 | 158p]
[알렙 (El)aleph (보르헤스 전집 3) ㅣ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역| 민음사| 1998.01.01 | 256p]

보르헤스는 한때 내게 근거 없는 외면의 대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의미 없는 편 가르기 의식의 잔영일 뿐이지만,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는 한때 그의 글을 읽지 않았다. 실제로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 자크 데리다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았다.

진보 사상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던 1990년대 중반의 한국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이 불었다. 그 사이 군에 다녀왔던 나는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뒤바뀐 이데올로기 지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부의 변한 현실은 전혀 없음에도 외부의 변화로 야기된 충격파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으니까.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은 나름의 사상적 의의를 갖고 있는 조류였지만, 국내 유입의 시기와 그 여파가 나를 시니컬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당시 캘리니코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나 송주성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없다>> 같은 책들을 열심히 읽고 열 올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던 것을 지금은 젊은 날의 열정으로 추억할 뿐이다.

그러다 얼마 전, 철 지난 심리 테스트- ID 솔루션 취향 테스트 -를 했을 때, 보르헤스를 다시 만났다.
근거 없이 싫어했던 그가 내 취향의 사람들에게는 ‘영웅’이란다.
삶의 아이러니야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요즘 내가 <환상>과 <현실> 간의 조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0세기 라틴 문학이 꽃 피운 ‘환상적 사실주의’가 머리를 스쳤고, 그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보르헤스를 떠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민음사에서 전집으로 발간된 보르헤스의 책들 중, 소설가 데뷔 시절의 단편을 모은 <<불한당들의 세계사>>와 그가 절정기에 쓴 소설집이라 할 수 있는 <<알렙>>을 읽었다. <<픽션들>>을 먼저 볼까 싶었지만, 어쩐지 개구리 울음소리 비슷한- ‘알렙, 알렙’ 소리 내어 되풀이하면 어쩐지 ‘개굴개굴’이나 ‘ribbit-ribbit’처럼 들려서... -_-;; - <<알렙>>에 더 끌리더라.

국내 판타지 소설 중 속칭 ‘이계 진입물’을 읽을 때면, 묘한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기 전, 현실을 다룬 장면이 한 챕터 이상 '재미있게' 진행된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과 관계에 재미를 느껴 읽다가 갑작스러운 계기로 이계로 넘어갈 때, 왠지 모를 식상함과 함께 더 읽을 마음이 사라지더라.
이는 ‘현실’과 ‘환상’이 조화되지 못하여 자연스러운 심상과 공감을 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활발히 활동한 시대는 미스터리와 SF가 장르문학을 꽃 피우고 있을 때다. 보르헤스는 이 두 장르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소설 속에 이 장르들을 녹여놓기도 하였다.
그의 소설에는 추리적 전개와 함께 낯선 환상과 익숙한 현실이 멋지게 조화되어 있는데, 그가 위의 두 장르소설들을 좋아한 것도 분명히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문, 편지, 일기 등의 전거를 이용해 현실 속에 판타지를 넣거나 환상 속에 현실을 도입하는데 진실과 거짓 전거를 혼용해 현실적인 이야기인 듯 보이는데도 지극히 환상적인 느낌을 주거나, 판타지인 것 같은데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또한, 간간이 눈에 띄는 추리 기법과 반전 효과로 그 느낌을 더욱 확장시키는 데에도 능숙하다.

본래 실제의 현실이 지극히도 환상적인 예는 수없이 많다.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진실이 어디 한두 개던가.
아직은 생각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얼마나 글로 표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 안의 환상을 보여 주거나 판타지 안의 현실감을 삽입하는 단초를 잡은 듯하다.
환상을 실제화하기, 현실 속에 환상을 삽입하기.
당분간은 진행형의 화두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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