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빅슬립 Big Sleep》,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2004(1939), 북하우스 by 신독

확실히 좋은 기획에 의해 탄생한 책은 뭔가 다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 중에서 뽑은 이 문장은 챈들러의 글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챈들러의 소설을 읽고 감탄한 것은, 그 작품이 호소해오는 리얼리티였습니다. 그는, 작가에게 삶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있고, 사물을 파악하는 확실한 시점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허구를 묘사해도 리얼리티는 반드시 스며 나오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모방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 중에서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작가의 시점을 모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말로 고룡의 작풍을 따르는 게 어렵다는 내 생각을 적실하게 표현한 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고룡의 독특한 눈은 등장인물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통해 글의 곳곳에 녹아 있는데, 이것은 따라한다고 쉽게 나오는 맛이 아니다. 하루키는 이걸 저렇게 멋지게 표현했구나.

“빅슬립”을 읽으며 하루키의 견해에 깊이 공감했다.

“기나긴 이별”을 보면서도 느꼈는데, 챈들러가 그려놓은 40년대 미국의 모습은 너무도 생생하여 낡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가히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하등 손색이 없는 하드보일드 소설인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전이라 하지 않겠는가.

확실히 장편 데뷔작인 “빅슬립”은 마지막 작품인 “기나긴 이별”과 비교할 때, 주인공인 필립 말로가 더 야성적이다. 작가와 주인공이 함께 나이를 먹은 것이리라.

이때는 아직 챈들러가 김릿의 맛을 몰랐던 듯, “기나긴 이별”에 멋지게 표현한 칵테일, 김릿 얘기가 안 나오더라.

발표되었던 1939년 당시에는 이 소설의 소재가 꽤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포르노 대여업자와 동성연애자, 발작을 하는 십대 소녀와 도박을 즐기는 유부녀 등. 지금은 식상하다 할 그 소재가 그래도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챈들러의 필력 때문이다. 놀랍도록 생생하다. 꼭 중절모를 쓰고 40년대 미국에 갔다 온 것만 같다.

“빅 슬립”을 발표했을 때, 챈들러의 나이는 51세였다. 굉장히 늦은 데뷔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약력을 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간다. 시를 쓰고 기자 활동을 하며 스케치와 에세이, 번역물 등을 발표하던 챈들러는 대브니 오일이라는 회사의 부사장까지 했던 사람이다. 40대가 되어 장기 결근과 지나친 음주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데다 18세 연상의 부인이 발병한 게 1932년.

그가 돈이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당시 챈들러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절망에서 헤맨 듯하다는 것.

결국 필립 말로의 탄생은 나락까지 떨어진 중년의 지성인이 나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고 내 생각. 돈이 없어 술 마실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다면, 고룡이 정말 숭배했을 텐데.)

“빅슬립”에도 고룡이 영원한 테마로 썼던 ‘우정’에 대한 단초들이 보인다. 필립 말로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스턴우드 장군, 말로가 사건 추적 도중 만나는 순정남 해리 존스, 그리고 리건.

고룡이 자주 등장시켰던 여성 캐릭터, 팜므 파탈의 매력을 지닌 여성도 둘이나 나온다. 스턴우드 장군의 두 딸인 비비안과 카멘이 모두 이런 캐릭터다.

물론, 고룡이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건 아직도 내 짐작일 뿐이다. 그리고 고룡이 한 장면을 통째 베끼거나 괜찮은 문장들을 따왔을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아는 고룡은 술고래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다.

“빅슬립”을 보다 안 또 다른 즐거움 하나.

레이먼드 챈들러가 영향 받은 작가가 헤밍웨이란다. 헤밍웨이가 하드보일드의 시조라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챈들러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고룡, 레이먼드 챈들러를 알기 전에 헤밍웨이를 먼저 알았고, “인간은 파멸당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을 무지 좋아하였다.

그런데, 레이먼드 챈들러가 다름 아닌 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았다니.
정말 신기하여라.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이 모두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니.

이 작품, “빅슬립”은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국내에 DVD 출시가 되어 있단다.
냉소적인 마초, 보가트.
그래, 당신이야말로 필립 말로 역으로는 딱이다. 이 영화 꼭 봐야겠다.


* 제목인 "빅슬립"의 의미는 밝히지 않겠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밀려오는 고전의 감동을 몇 마디 말로 '미리니름'하기는 싫으니.
** 하루키의 데뷔작, "양을 둘러싼 모험"이 의도적으로 "빅슬립"의 문체를 빌린 것이란다. 읽은 지 오래 되어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다시 보고 싶어진다.